공지영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를 읽다
지각 독서다. 어제 진주시내 <더웨이닝커피>에서 웬 학생들이 좋은 일에 쓴다며 헌책을 판다기에 대번에 달려가 만 원에 네 권을 샀는데 그중에 이게 들었다. 언제였던가, <문화방송>에서 <책을 읽읍시다> 할 때 소개된 책이다. <봉순이 언니> 말고도 최문희의 <난설헌>, 양귀자 연작소설집 <원미동 사람들>, 안병선 <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를 샀다.
<원미동 사람들>은 세 번째 샀다. 두 번 모두 맨앞에 나오는 <멀고 아름다운 동네>만 읽고 딴 사람에게 선물로 줬다. 어딘가에 내 책도장도 찍었더랬는데, 어제 그 커피숍에서 <원미동 사람들>을 보자마자 오랫동안 우리집에서 함께 살던 식구가 집나갔다가 몇 달 만에, 아니 몇 년 만에 돌아온 것처럼 반갑고 그랬다. <봉순이 언니>는 사 읽기로는 처음이지만 하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던 터라 반가움이랄까 기대랄까 하는 건 이것저것이 거의 똑같았다.
봉순이는 주인공 짱아의 집에 얹혀살면서 아이도 돌보고 밥도 짓고 청소도 하는 식모이다. 껄렁껄렁한 세탁소 총각과 눈이 맞아 도망갔다가 배가 불룩해져 돌아왔다. 온몸에 얻어맞은 상처투성이였다. 나(짱아)의 어머니는 봉순이를 설득하여 낙태수술을 해 준다. 그러고서 딸 하나 낳고 상처한 시골 남자에게 정식 혼인을 시켜 준다. 봉순이의 첫 남편이자 두 번째 남자는 지병이 있었는데, 아들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어머니는 그가 진 약값 빚을 갚아주고 봉순이가 제대로 된 삶을 찾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봉순이는 그 뒤로도 수없이 우리집을 드나들었다. 이사를 가면서 주소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는데 어찌 알고 찾아오곤 했다.
어린시절 나의 전부였던 봉순이 언니의 힘겹고 어려운 삶을 보면서 나는 철이 들었다. 봉순이 언니의 커다란 결심을 지켜보았고 그것이 망가지는 것을 보았다. 날로 현대화해 가는 우리집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정이라는 끈을 쉽게 놓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만남과 헤어짐을 배운다. 1960년대 그 시절 오갈 데 없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 식모들의 고달픈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철이 들었다.
봉순이 언니 친구 집에서 통속 주간 잡지를 읽었고 담배를 배웠으며 술을 마셨다. 봉순이 언니는 나를 큰 세상,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 통로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언니와 나의 운명은 그렇게 연결된다. 끝내 봉순이 언니는 아비 다른 아이 넷을 이 세상에 놓아두고서 다시 떠돌이 개장수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 그런 이야기를 주인공 화자인 내 나이 쉰 줄에 들어서 어머니로부터 듣는다.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희망이라는 걸 놓지 않으며 항상 잘될 것이라는 긍정으로 살아가던 봉순이 언니의 다음 삶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쯤 어느 지하철역 구석에 담배나 주간지를 파는 구멍가게라도 얻고 있을까. 어느 시골 간이역 앞에 허름한 선술집을 열어놓고 정처 없이 떠나고 또 떠나는 나그네들에게 잔술이라도 팔고는 있을까. 길고 힘들었던 인생살이의 굽잇길에서 정신을 아예 놓아버려 이름도 모르는 정신병원에서 주삿바늘에 팔목을 내밀고 있을까. 각각 아비는 다르지만, 그렇게 내질러버린 자식들이 그나마 제대로 성장하여 늙고 쭈글쭈글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아웅다웅 안달복달하면서 살기나 할까. 그런 신산한 삶을 거두어들이고 감싸 안을 만큼 우리 사회가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져 주변을 둘러보기는 할까.
엊저녁 늦게 시작한 독서는 오늘 오전 10시가 안 되어 끝났다. 긴 연휴에 한 권은 읽었다. 우리집 책꽂이에 꽂혔다가 나가고 다시 들어왔다가 나가곤 한 <원미동 사람들>을 다시 손에 들어야겠다 생각한다. 사람도 그렇겠거니와 책도 한번 집에 들어왔으면, 한 독서가의 손에 잡혔으면 끝까지 읽히고 싶을 텐데, 그런 생각이 통 없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책은,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말을 해주는가. 우리에게 지나간 인생살이를 들려주고 앞으로 다가올 세상살이를 미리 귀띔해 주겠지. 불행한 삶에도 건강한 정신이 있고 나쁠 것 없이 진지한 삶에도 허방은 늘 놓여 있기 마련인 이치를 말해주지 않겠는가.
봉순이 언니에게서 오뚝이 같은 인생 철학도 배워보고, 허망하고 부질없는 삶에 대한 희망도 느껴보고, 좀은 엉뚱한 독서 철학도 배워본다. 쓰잘데없는 개똥 철학이라고 한들, 막걸리 한 잔 마시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진다.
그건 그렇고, 공지영 소설은 <고등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의자놀이> <도가니> <높고 푸른 사다리> 들을 읽었는데, <높고 푸른 사다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화 <국제시장>의 압권 흥남철수 장면은 이 소설에서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한다.
201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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