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장대동 ‘길 아랫집’을 우리는 ‘굼터’라고 했다. 길에서 푹 꺼진 땅이라는 뜻인 듯한데 잘 모르고 썼다. 딴 데로 이사 간 뒤 우리는 “장대동 굼터에 살 때”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표준어인지 사투리라 하더라도 그런 말이 있긴 한지 알 수 없었다. 어른이 쓰니 아이들도 따라 쓴 것이다. 장일영 님이 지은 ≪진주지역방언집≫(금호출판사, 2002)에 보니 ‘굼턱’, ‘굼티’는 진주말로 구덩이라는 뜻이란다. 길에서 볼 때 우리 집은 구덩이처럼 푹 꺼졌으니 굼턱이었다. 표준어는 아니지만 ‘장대동 굼턱 집에 살 때’라는 표현은 가능한 셈이다.
30년도 더 된 일들이니 기억이 듬성듬성하다. 일기장에 써 놓은 것도 아니고, 페이스북 같은 게 있어서 올려놓은 것도 아니다. 사진도 없다. 모든 걸 기억에 기댈 수밖에 없다. 더 까먹기 전에 기억나는 만큼이라도 정리해 놓자 싶어 이런저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써 본다.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힘들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다. 사건의 앞뒤도 섞바뀐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면 희한하게 빛바랜 필름이 복원되는 경우도 겪는다. 뇌세포 깊은 곳에 저장되어 삭아가던 추억 한 도막이 향긋한 냄새를 피워 올리는 과정은, 나에겐 즐거움이다.
삼 층의 불법 복제 테이프 장수 총각 아저씨가 뜬 뒤, 멀쩡한 신사 한 명이 세 들었다. 머리카락은 이마에서부터 뒷목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직모였다. 얼굴은 구릿빛인데 햇볕 아래서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해끔한 손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굵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의 눈은 가늘고 동자는 작았다. 중앙시장 옷가게에서 팖 직한 잠바와 바지를 입었고 넥타이 매지 않은 흰 셔츠를 주로 입었다. 인상착의를 잘 기억하는 건, 세 든 사람답지 않게 아버지와 굉장히 친하게 지냈고 따라서 우리 집 큰방에서 밥을 같이 먹거나 아버지와 소주를 나눠 마시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어디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말씨는 경상도가 아닌 건 분명했지만, 강원도인지 충청도인지 전라도인지 아니면 서울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집안이 기울었고, 가족들 모두 내버려두고 도망치듯 흘러흘러 진주까지 왔노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굶어죽게 생겼으니 아버지와 같이 공사장에서 모래든 벽돌이든 지겠노라 다짐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처음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공사장에서 아버지와 우연히 만났는데 말이 통했고, 일 마친 뒤 막걸리 한잔하다 의기투합한 것이란다. 마침 삼 층 방이 비었으니 뭔가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 돌아가던 것이었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몇 잔에도 횡설수설이었지만 가만히 엿들어보면 이야기에 졸가리가 서 있긴 했다. 세상일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게 없는 듯했다. 전두환 욕하다가 아버지와의 대화가 중단된 것을 빼고는 짝짜꿍이 너무나 잘 맞았다. 농투성이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가 보기에 그는 엘리트였고 만물박사였고 그래서, 나이가 어려 동생이지 스승으로 모셔도 될 것 같았을 것이다. 그간의 행동과 말을 보면 알 만하다. 아버지 헌옷을 얻어 입고 아침에 나란히 일터로 향했고 저녁엔 똑같이 취하여 들어오는데 자전거는 아저씨가 끌고 왔다.
‘형님, 제가 말이죠’ 이건 내가 붙여준 그 아저씨의 별명이었다. 입만 열면 “형님, 제가 말이죠.”로 시작하여 서울에서 사업한 이야기, 강원도에서 눈사태 맞은 이야기, 가족 버려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이야기를 왕거미 똥구멍에 거미줄 나오듯이 줄줄줄줄 잘도 지껄이던 것이었다. 말 많은 사람이란 도무지 믿음직스러운 데가 없는 법인데, 아버지는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마주앉아 껄껄 웃다가 지치면 “인자 올라가 자라.”고 했다. 그러면 두말없이 “네, 형님 내일 뵐게요.”라며 깍듯이 인사하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삼 층 철제계단을 올랐다.
두 달 반이나 지났을까. 어느 일요일 고등학교 자율학습이라는 것을 하고 여섯 시쯤 집에 오니 집안 분위기가 괴괴했다. 알 수 없는 나쁜 기운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워낙 일요일도 없는 집인지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윽고 삼 층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올려다보니 아버지, 어머니였다. “이놈의 새끼 잡히기만 해봐라.” “경찰에 신고를 합시다.” “작정하고 날아간 놈을 경찰이 무슨 수로 잡나? 이름을 아나, 주소를 아나?” “아니, 그렇게나 죽고 못 살게 붙어살면서도 그래, 이름 하나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그냥 김씨고 형님이면 됐지, 남자들끼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고받는 대화 몇 마디로 난 투명유리 안을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형님, 제가 말이죠’ 아저씨가 불법 복제 테이프 장수 찜쪄먹을 정도로 용의주도하게 야반도주를 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집 주인도 아니고, 그러니 월세를 떼인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 것이며 경찰에 신고할 것은 뭐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아버지, 어머니는 식식거리며 내려왔다. “그 아저씨 도망갔십니꺼?” 물으니 “그래!”라며 소리를 꽥 지르고는 “소주나 한 병 사오너라.” 한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살붙이보다 더 살갑게 대하던 그 ‘형님, 제가 말이죠’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돈 50만 원을 빌렸는데,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언제 빌려줬는지 물으니 바로 어제란다. 세상에….
“세상에서 잘 모르는 사람이 너무 친절하거나 살갑게 대하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이 말은 그 사건 이후 아버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삶의 교훈이었다. 불콰하게 취한 날 저녁 삶의 교훈을 시작하면 언제나 “아무리 친해도 은행 대출 보증서지 말고!”라며 다짐받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나는 물었다. “내가 대출 보증이 필요하면 누구한테 부탁합니꺼?” 그렇게 서로 믿고 보증을 섰다가 당하기도 하고, 나도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에게 부담을 지우기도 하는 게 인생이고 삶 아니냐 따진 것이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쏘아보기만 했다.
삶의 교훈에도 사족이 꼭 있었으니, “에이 더런 놈, 그래, 그 50만 원 갖고 잘 먹고 잘 살아라.” 공사장에서 하루 종일 피땀 흘리며 허리 부러질 듯 등짐 지고 나면 2만~3만 원 정도 벌 때다. ‘에이 더런 놈, 지금쯤 저승에서 아버지에게 무릎 꿇고 싹싹 빌고 있어라.’ 이건 요즘 내가 던져주는 욕이다. 2015.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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