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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아들의, 딸이던 시절

by 이우기, yiwoogi 2015. 2. 5.

건넛마을 최 진사 댁에 딸이 셋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셋째 딸이 제일 예쁘다고 소문이 나지 않았나. 예쁘다는 건 뭘 말하는가. 얼굴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예쁘고 마음도 착하고 몸놀림은 부지런하고 음식 솜씨나 바느질 솜씨도 어여쁘기만 하여 신붓감, 며느릿감으로 으뜸으로 친다는 말 아닐까.

아들 넷 중 셋째는 그중 제일 멋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했을까.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좀 크고 머리도 좋고 마음도 착하고 그랬을까.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남의 집 셋째 아들더러 아따, 저 셋째 놈이 딸로 태어나야 했는데.”라며 입맛을 다시는 건 아무리 어른이라도 말씀을 너무 함부로 한 것에 속한다.

남자 어른 손님이 집에 오면 일단 술상부터 차려야 했다. 어머니는 일요일도 없이 시장에서 배추를 팔고 있었으므로 손님 모시기는 내 몫이었다. 쫓아가 술부터 사온다. 냉장고를 뒤진다. 시어빠진 배추김치도 보시기에 담고 아침에 먹다 남은 고등어구이도 젓가락의 침범이 잦았던 쪽은 버리고 나머지를 새 접시에 담는다. 동태찌개는 원래는 없던 청양초 하나 잘게 썰어 넣고 고춧가루도 조금 푼 뒤 보글보글 끓여 밥상에 얹는다. 그 정도 하면 남자 어른 손님들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버지 손에 끌려오면서 형수도 없는 집에 뭐 얻어먹을 게 있겠느냐?” 하던 말은 더 이상 못하게 되던 것이었다. 운 좋게 두부와 돼지고기를 담은 검은 봉지를 발견한 날엔 삼천 원은 족히 받았음 직한 찌개를 도나캐나 끓여 내놨다. 라면도 참 많이 끓였다.

어른들은 저 놈이 딸이었다면 딱 좋았겠는데?”라며 농을 걸었고 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그런 말을 칭찬인지 놀림인지도 구별 못할 숙맥으로 알았던 게다.

큰형이 결혼을 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맨 오른쪽 방 하나가 신혼방이고 가운데 방은 큰방이고 맨 왼쪽 방이 내 방이었다. 부엌은 내 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형님과 형수의 친구들은 주말마다 점심때를 맞춰 번갈아 집알이를 왔다. 오후 두세 시에 출근하던 나는 손님 뒤치다꺼리를 도왔다. 부엌에서 형님 방까지 십 미터 남짓을 수십 차례 왕복했다. 밥상째 들고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접시를 들고 힁허케 달려가기도 했다. 큰형이 결혼을 한 것도 고맙고 선한 얼굴을 한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 준 것도 고마웠을 따름이었다.

방 안에서, 특히 한 살 많은 형수 친구들은 너거 도련님 여자 친구 없으면 소개 좀 해주까? 우찌 저리 착하노?” 이딴 소리들을 하였다. 숨어 있거나 도망가지 않고 헤헤 웃으며 심부름하는 게 예쁘게 보였던가 보다. 실제 소개해 준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형수는 우리 친구들이 대럼이 딸 같다고 하더라.” 이런 말을 해주었다. 칭찬이었다.

그러니까 남의 집 귀한 셋째 아들을 놓고 못하는 소리가 없었던 것인데, 어찌 들으면 기분 나쁘고 화날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또 뒤집어 놓고 보면 그러한 소리를 듣는 것조차 나로부터 비롯한 것이니,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중학생 시절이던 열너덧 살 무렵의 일이 떠오른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면 설거지하고 빨래 개키는 게 일상이었다. 한 대문 안에 주인집 말고도 세 가족이 세 들어 살았다. 나는 수돗가에 물을 받아 놓고 퐁퐁을 풀어 부지런히 그릇들을 부셨다. 사촌동생이 놀러와 내 곁에 서서 한참 내려다보다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세상에, 이런 일은 여자들이 하는 거지. 남자가 돼 갖고 쪽팔리게 설거지를 하고 있나?” 사촌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동생의 일갈이 재미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말했다. “그래, 맞다. 남자가 힘이 세니 여자들을 시켜먹고 부려먹어도 된다는 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남자 스스로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지나가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하니 형님, 형수 친구들이나 아버지 친구들이 실컷 술 잘 얻어먹고 안주까지 알뜰히 잘 챙겨 드시면서 아들 둘 낳고 삼세번 만에 딸을 낳았으면 얼마나 호강하고 살았겠느냐?”거나 그랬으면 딸 낳을라고 넷째 막내까지 낳아 아들 키운다고 그리키나 고생 안해도 되었제.” 따위 싱거운 말을 한다 한들, 그걸 내가 직접 듣는다고 하여도 별로 할 말이 없긴 했던 것이다.

함박꽃같이 환하게 피어나던, 구만리장천을 날아갈 푸른 꿈에 부풀어 있던 어리고 젊은 시절의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간혹 여자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오늘 저녁 같은 날 가족을 위해 된장찌개를 뚝딱 끓여 저녁상을 곱게 차려낼 수 있는 용기와 실력을 한때 딸이 되어 배우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이 고맙다. 그건 그렇고, 이 몰골이 여자 사람으로 났으면 어찌 됐을까. 2015.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