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뭣이든 풍족하게 먹을 수 있던 때도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공사장 막일을 하는 아버지와 중앙시장 배추 장수 어머니로부터 나올 수 있는 먹을거리는 고등어, 명태, 갈치 같은 생선과 어쩌다 한 번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 찌개였다. 대신 배추김치, 무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동치미, 물김치, 열무김치 같은 푸성귀는 차고 넘쳤다. 어머니 덕분에. 그렇게 살던 때도 있었다.
장대동 길 아랫집 일 층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 혼자 좁다란 방 안에 온갖 잡동사니를 가득 쟁여놓고 살았다. 나이는 모르겠다. 일흔 살은 넘었지 싶었다. 몸매는(할머니에게 몸매라니) 그 시절 경로당에 가 보면 딱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얼굴에는 지난한 삶의 굴곡을 말없는 말로 모두 이야기해 주겠다는 듯 굵은 주름이 여럿 그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은 늘 밝고 여유 있었다. 남은 이가 몇 개 안 되어 발음이 새어버려서 그렇지 말도 침착하게 하는 편이었고 웃을 때는 박장대소하곤 했다. 우리는 워낙 만날 일이 잦지 않고 만난댔자 공통 화제가 없는 것이어서 더 이상 할머니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할머니보다 훨씬 늦게 전세 얻어 들어간 어머니는 터줏대감에게 살갑게 대해줬나 보다. 할머니는 본채에 전세 들어간 우리를 함부로덤부로 대하지 아니할 마음을 먹었는지 이리저리 마음을 맞춰나가게 된 것 같다. 할머니는 중앙시장 어디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일을 알게 된 건 어느 날 아침 밥상에 올려진 소고깃국 덕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고기 맛이 나는 시래깃국’이다. 바로 앞날까지만 해도 시래깃국에는 대가리와 똥을 따지 않은 멸치가 보이곤 했는데, 하루아침에 천지개벽한 것이다. 다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겠나.
“아랫방 할매가 식당에서 일한다 안 쿠더나? 소고깃국도 팔고 돼지찌개도 팔고 그라는 갑더라. 고깃국에 안 들어가는 기름딩이를 잘라서 내삐는데 혹시 묵을랑가 싶어 갖고 왔다 쿠네. 돼지로 치모 비곈데, 우떴노?” 어떻고 저떻고 할 게 어딨겠나. 난생 처음 맛보는 구수한 미끌미끌함에 애저녁부터 홀딱 반해 버렸는걸. 아버지나 형이나 동생이나 헤벌쭉 웃으며 침을 흘릴 지경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돼지고기, 소고기를 아예 못 먹는 어머니는 그런 우리를 신기하게 빤히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새벽 다섯 시쯤 일을 나가면 저녁 열 시쯤 들어왔다. 하루 종일 어찌 버티고 일하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어떤 땐 열두 시가 다 되어 들어오기도 했다. 마당에서 대충 세수만 하고 방에 들어가면 곧 불을 껐다. 빨래는 언제 하는지 목욕은 언제 하는지 궁금해졌고, 밥은, 아, 식당에서 삼시세끼를 다 해결하는구나, 이런저런 궁금증을 스스로 만들었다가 스스로 해답을 찾곤 했다. 자식이 있는지, 그래서 손자손녀도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건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소고기 기름덩이를 검은 봉지에 싸 왔다. 할머니의 검은 봉지에 든 소고기 기름덩이는 우리에게 천하의 산해진미보다 몇 곱절 더 맛있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당시 우리들의 뱃속에는 기름기라고는 바가지로 긁어도 없었는데 그 국 덕분에 뱃속이 좀 미끌미끌해지고 큰창자 작은창자에 살도 제법 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 전보다 주량이 많이 늘었을 테고 공장에서 일하는 큰형은 칼칼하던 목이 엄청 개운해졌을 것이다. 방귀냄새도 좀 구수해졌을까. 할머니는 간혹 살코기를 좀 넣어 왔다. 식당에서 애매하게 한 조각 남은 걸 챙겨왔다고 했다. 우리가 정말 환장할 정도로 잘 먹고 할머니 얼굴을 뵐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올리니 그저 흐뭇해졌던가 보다. “맛있더나?”라고 묻고 마는 할머니에게서 우린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따뜻함을 느꼈다. 먹는 것에 약한 게 인간이더라.
할머니의 검은 봉지도 요술램프였지만, 다리 네 개 달린 짐승은 아예 입에도 대지 못하도록 태어난 어머니의 기막힌 음식 솜씨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당연한 일이다. 기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멸치 맛국물에 시래기 넣고 할머니로부터 기증받은 소고기 기름덩이 대충 썰어 넣은 게 전부다. 그래도 지금껏 감사하고 또 감동받는 건 시래기를 기막히게 맛있게 말리고 삶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입과 혀와 위와 간과 장에, 그리고 눈과 코에 딱 맞도록 맛있게 끓여내던 어머니의 그 솜씨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기억나는데, 할머니가 언제 무슨 까닭으로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도 집 주인이 아니니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학교 갔다 온 사이에 일 층 방이 휑뎅그렁하게 비어져 있었던 것이다. 자로 재어보면 가로 세로 삼 미터도 되지 않을, 즉 한 평도 되지 않을 그 방에서 할머니의 짧은 밤은 어떠했을까, 또는 긴 한숨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할머니에게 주어졌던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으며 고독의 깊이는 어디로 번지고 있었을까. 한 시절 우리들의 밥상을 찬란하게 해준 그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 그립다.
감자탕, 돼지국밥, 소고기국밥, 시래깃국, 뼈다귀해장국 같은 국을 즐겨 먹는 편이다. 내 뇌 속에는 소고기 기름덩이 시래깃국이, 그 국에 대한 추억이 아주 잘 정돈되어 보관돼 있다. 하지만 그때 먹던 그 맛은 찾을 수 없다. 어머니는 간혹 돼지앞다리 또는 뒷다리를 사서 뼈다귀해장국을 한 솥 끓인다. 솥은 웬만한 사람 목욕물을 끓여도 넉넉하다 할 만큼 크다. 그 솥에 한가득 뼈다귀해장국을 끓여 놓으면 그 자리에서 안주삼아 둘 앞에 한 그릇씩 비우고 저녁밥 먹을 때 또 대접에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우고 집에 돌아갈 때는 각자 두세 끼니는 너끈히 먹을 만큼 싸간다.
한다하는 식당을 돌아다녀 봐도 어머니 솜씨에 견줄 만한 곳을 찾기는 어렵던 것인데, 그 시절 할머니가 가져다 준 소고기 기름덩이는 돼지, 소와 사이가 너무 좋지 않던 어머니의 손길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제 맛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이었으니. 결국 모든 입맛의 귀착점은 어머니로구나, 싶다. 그건 그렇더라도, 지금도 그 할머니에게 감사한다. 2015.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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