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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야식계의 새로운 강자 ‘가래떡구이’

by 이우기, yiwoogi 2015. 1. 20.

야식은 되도록 안 먹는 게 좋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면 간단하게 먹는 게 좋다. 소화가 잘 되어야 한다. 얼마 있지 않아 잘 것이므로 위에 부담이 없어야 한다. 다음날 아침 거울에서 퉁퉁 부은 낯선 얼굴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머릿속에서 야식이 생각나면 배가 고프다는 뜻이고, 배가 고프다 보면 뭐든 먹어야 하고, 먹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먹게 되는 게 야식 아닌가. ‘야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건 라면, 떡볶이, 순대, 통닭(요즘은 치킨이라고 하지), 족발, 만두, 고구마, 감자... 대충 이렇다.

 

엊저녁 거나하게 취하여 들어오니 아들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1010분을 넘어가고 있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배가 고프단다. 표정엔 뭔가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잘 것이라는 뜻이 역력하다. 중학교 3학년 올라가는 청소년의 배는 저녁밥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그렇지만 10시는 애매하다. 평소 야식 먹는 시간의 기준은 10시이다.”라고 강조해왔다. 뭘 급하게 준비한다고 하여도 1030분은 될 테고, 간단히 먹는다 하여도 11시는 되어야 먹기를 마칠 것 아닌가. 그렇다고 딱히 내놓을 것도 없다. 전화를 하여 뭘 시키자면 더 늦어버릴 게 뻔하다.

 

냉장고 위칸을 뒤져 가래떡을 찾아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들 표정을 볼 때부터 머릿속에서는 냉장고 아래 위 칸을 부지런히 뒤지고 있었던 터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약간 두르고 떡 여남은 개를 얹는다. 꽁꽁 언 딱딱한 떡을 야들야들 말랑말랑하게 녹이면서 익히려면 최대한 낮은 불로 데워야 한다. 프라이팬을 자주 흔들어 주어 눌어붙지 않도록 해야 하고 떡끼리 지나치게 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건 익히 해본 터라 기본 중의 기본에 속한다. 10분쯤 넘어가니 떡 살갗은 약간 노란 빛을 띠기 시작하고, 젓가락으로 눌러보니 속까지 잘 녹은 듯했다.

 

떡을 어디에다 찍어 먹어야 할까. 꿀이 좋다. 꿀은 노폐물 제거, 피부 미용, 변비 해소, 숙취 해소, 면역력 증진, 위장병, 기침 치료와 완화 등에 좋다고 한다. 내가 알겠나. 인터넷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이중 숙취 해소말고는 죄다 아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꿀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황설탕을 뿌려준다. 황설탕은 미네랄이 풍부한 건강식품이다. 옛날에는 단맛을 내는 조미료로 쓰이기보다 강장, 진통, 정신안정, 위장의 원활화 등 약리작용을 하는 약으로 쓰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상체질에서는 체질에 관계없이 모든 체질에 유익한 식품이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건 나의 취향이자 지혜이다.

 

그리하여 아들의 간식이 완성되었다. 잘 익은 떡에 황설탕을 뿌려주고, 꿀을 살짝 찍어 먹도록 해줬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본가에서 가져온 물김치 국물. 떡이 목구멍을 잘 넘어가지 않으려 할 때 물김치는 아주 그만이다. 시원하고 달달하고 약간 새콤한 게 죽여준다. 숙취 해소용으로 즐겨 먹는 물김치를 아들에게 양보한 건 파격적인 배려이다, 라고 생각한다. 역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녀석은 떡은 딱 하나 남겼고, 꿀은 거의 핥아 먹었고, 물김치는 홀랑 다 마셔버렸다.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라고 하는 말과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는 인사가 나에겐 즐거움이고 행복이고 또한 보람이다


 

7시 약속을 위하여 집을 나서는 나에게 녀석은 요즘은 먹고 싶은 걸 많이 못 먹었어요.”라며 항의한다. “그래, 뭘 먹고 싶니?” 하햄버거, 피자, 치킨...”이라며 이것저것 주워섬긴다. “그래, 다음에 사줄게!”라고 하니 만날 다음에 그래요.”라며 조금 서운한 표정이다. 그런 녀석인데, 가래떡을 구워주니 잘도 먹는다. 평소 제 어머니가 고구마나 감자를 구워줘도 잘 먹는다. 물론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줘도 잘 먹는다. 뭐든 잘 먹고 안 아픈 게 고마울 뿐이다. 아무튼 야식 가래떡구이를 그렇게 맛있게 먹으면서도, 내가 만취상태에서 요리를 했다는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또 얼마나 다행인가.

 

2015.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