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1월 26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올해 연말정산 과정에서 국민께 많은 불편을 끼쳐 드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을 옮겨 놓은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이 분은 자다가 책상다리에 고약을 붙이고 있구나.’ 또 ‘국민들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고생한 사람들 참 힘 빠지고 맥 빠지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통령은 얼마 전 연말정산과 관련하여 처음 언급할 때 뭐라고 했는가. “국민이 잘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 후보일 때 “정수장학회는 기업으로부터 뺏은 장물 아니냐.”고 묻는데 “문제가 된다면 장학회 이름을 바꾸겠다.”고 대답하던 것과 어찌 그리 같을까. 유체이탈 화법, 자신은 제3자인 듯한 이 화법은 지난 정부 대통령이란 사람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연말정산이라는 것을 한 지 20년은 넘었다. 예전에는 아플 때 갔던 병원과 약국마다 찾아다니며 영수증을 모았다. 카드사, 보험사에서 영수증 날아오면 일일이 모았다. 절에 시주한 경우 일부러 절까지 찾아가서 서류를 받아왔다. 이것들을 흰 종이에 차례차례 깔끔하게 붙이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걸 총무과에 넘겨주면 총무과 직원들은 수십 일 동안 입력하고 확인하느라 퇴근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고서도 뭔가 맞지 않아 두 번 세 번 맞춰보고 점검하곤 했다. 정말 연말정산하기 어려웠고, 그건 큰 불편이었다.
그에 견주면 요즘 연말정산은 정말 편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연말정산간소화서비스 사이트에 들어가면 죄다 다 정리돼 있어서 별로 할 일이 없다. 아들 교복 바지 산 것까지 교육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고, 재래시장에서 쓴 카드 내역도 죄다 올려져 있다. 국세청에 입력이 안 되는 몇 가지 서류는 우편으로 오거나 팩스로 받는다. 그러면 끝이다. 비록 올해의 경우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 짜증이 좀 나긴 했지만, 옛날에 견주면 아주 많이 편리해졌고 편해졌고 쉬워졌다. 그건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연말정산 서류를 정리하는 데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불편을 끼쳐드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은 왜 나왔을까. 대통령은 월급쟁이가 화내는 이유를 ‘불편’ 때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연말정산 때문에 월급쟁이들이 뿔난 것은 불편 때문이 아니다. 월급쟁이들의 꼭뒤가 돈 건 세금이 엄청나게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세금을 올리지 않았다고 억지를 부리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담뱃값도 올랐다. 그에 반해 부자 중의 부자인 재벌들은 법인세를 깎아줬다. 그 와중에 지난 정부 때 저지른 온갖 비리와 정책 실패로 날려버린 세금이 수십조라는 말이 나왔다. 소주 값 올린다는 말도 나왔고, 주민세를 두 배 정도 올릴지 모른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니 월급쟁이들이 쇠망치라도 들고 달려가 부숴버리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겠나.
그런데 “불편을 끼쳐드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니 이게 말인가. 정말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국민 여러분, 불가피하게 세금을 조금 올리게 되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미안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정부에서 나라 곳간을 거덜내어버려 그런 것입니다. 직장인 월급 오른 것에 걸맞게 재벌들 세금도 올리겠습니다. 역시 세금 때문에 담뱃값을 올려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화나고 짜증나고 정부를 욕하고 싶으시겠지만, 제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계속 잘못한다 싶으시면 쇠망치를 들고 쫓아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일 대통령이 이런 정도로 반성하고 사과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월급쟁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는 진정성을 보여준다면 누군들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제 늦어버렸다. 사과는 해야 할 때 정확하게 해야지, 한 번 했다가 미흡하다며 다시 하면 오히려 더 화나게 하는 짓일 뿐이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월급쟁이들을 제대로 이해시키지도 못했고 진정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도 못했다. 지지율이 30% 밑으로 떨어진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만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외려 신기하다. 여론조사도 못 믿겠다.
한마디만 더 하자. 정치인들 툭하면 “유감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주객이 전도된 잘못된 말이다. 유감(遺憾)은 ‘마음에 차지 않아 못마땅하고 섭섭한 느낌’ 또는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다’는 뜻이다. 이 뜻대로 해석하자면, 국민들이 대통령의 뜻을 몰라주어 대통령이 섭섭하고 불만스럽다는 말이다. ‘느끼는 바가 있음’이라는 뜻의 유감(有感)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게 말이 되는가. 유감이란 말은 국민이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고 해야 할 말 아닌가. 참 우습고 우습다. 깨끗하게 “미안합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대로 된 사과는 언제 한 번 받아보려나. 201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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