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봄은 제아무리 살짝이 온다 해도 우리는 눈치껏 알아챈다. 봄은 제 딴에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온다 해도 우리는 그 발소리를 천둥소리처럼 듣는다. 봄은 남들 다 자는 깊은 밤에 도둑처럼 몰래 온다 해도 우리는 꿈속에서 이미 다 알고 있다. 봄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를 얼마나 황홀하게 해줄 것인지,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 것인지 다 알고 있다.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 그는 바보다.
살그머니 피는 꽃을 본다. 꽃은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을 내밀어 지금 피어도 얼어 죽지 않을까 공기 맛을 보지만 우리는 안다. 꽃은 필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고 가만히 있어도 나비가 찾아들게 된다는 걸 우리는 안다. 꽃은 빨갛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고 하얗기도 하지만 다 한가지로 아름답고 한가지로 매혹적이며 한가지로 사랑스럽다는 것을 우리는 오랜 경험으로 오랜 느낌으로 안다. 꽃은 꽃 아닌 그 무엇도 아니기에 꽃으로서 충분히 아름답다. 꽃은 꽃이다.
님이 오는 향기를 맡는다. 님은 멀리서 천천히 걸어와도 진한 향기는 먼저 달려와 코끝에 매달린다. 님은 올 듯 아니 올 듯 용심을 부려도 우리는 님이 기어이 우리에게 다가와 깊은 입맞춤을 해줄 것을 믿는다. 님이 미소 지으면 우리는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님이 흥얼거리면 우리는 손뼉 치며 노래 부른다. 님은 우리를 웃게 만들고 노래하게 만들고 춤추게 만들고, 그리고 님은 우리를 슬프게도 만들 힘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님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안 믿으면 바보다.
밝은 세상이 오는 걸 느낀다. 밝은 세상은 억누르는 사람도 없고 뺏어가는 사람도 없고 때리는 사람도 없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없는 그런 세상이다. 밝은 세상은 그러나 저 혼자 가만히 오지는 않는다. 밝은 세상은 봄처럼 오지도 않고 꽃처럼 피지도 않으며 더더구나 님처럼 오는 게 아니다. 밝은 세상은 두 눈 부릅뜬 사람에게 제 본디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에게 제 맑은 음성을 들려주며 힘껏 뛰어가 주먹으로 어둠을 깨뜨리는 사람에게 비로소 완전한 자기 몸을 보여준다. 그 어둠 너머에는 봄에 피어나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든 한 님이 서 있으니, 그가 밝은 세상이다. 그를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른다. 201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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