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배식’이란 말이 있다. 한자로는 ‘團拜式’ 이렇게 쓰고, 뜻은 ‘단체의 구성원이 모두 모여서 한꺼번에 절을 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좋은 뜻이고 좋은 일이다. 어느 시의회에서 ‘2015년 시무식 및 단배식’을 한 모양이다. 언론 보도도 있었고 사진도 봤다.
몇 해 전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사람들이 새해를 맞이하여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얼굴 마주 보며 담배를 피우는가 보다. 그것 참 웃기는 일이로구나!’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설마 그러기야 할까’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단배식’이란 말이 버젓이 올려져 있었다. 평소 이 말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생각을 이어 가 본다.
이런 말을 쓰는 데가 얼마나 있는가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제법 나온다.
∙ 새누리당 울산 북구 당원협의회 단배식 개최
∙ 충청권 여야 시도당 현충원 참배·단배식
∙ 새정치민주연합 세종시당 신년 단배식
∙ 전당대회 방불케 한 새정치연합 전북도당 단배식
대강 이렇다. 새해를 맞이하여 시무식 또는 새해 인사회를 하는 데가 정치권뿐만은 아닐 텐데, 민간 기업이나 다른 사회단체에서 단배식을 했다는 소식은 안 보이고, 여야 정치권만 단배식을 하는 것 같다.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단배식은 일부 정치인들만 하는 것이다.’이다.
보통 어떤 말을 쓸까. ‘새해 맞이 인사회’, ‘신년회’, ‘신년인사회’, ‘신년하례회’ 이렇게들 쓴다. 그냥 ‘시무식’이라고 해도 된다. 시무식 식순에 ‘마주 인사하기’를 넣으면 된다. 인사회나 신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을 것이다. 단배식과 무엇이 다를까. 사전 뜻대로라면 단배식은 ‘단체의 구성원이’, ‘모두 모여서’, ‘한꺼번에’, ‘절을 하는’ 의식인데, 꼭 그렇게 모여 굳이 한꺼번에 절을 하는 모임이 있을까. 결국 인사회이고 신년회와 같을 것 아닌가. 빙 둘러서서 고개 숙여 인사하거나 손을 맞잡거나 그러지 않을까. 그래서 ‘새누리당 사천시당원협, 2015년 신년회 가져’, ‘범시민단체연합 합동신년회’ 이렇게들 쓰고 있는 것이다.
단배식이란 말을 보면서,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우리는 너희들과 다른 사람이야.” 하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오래 전부터 써 왔으니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그저 쓴 것 같기도 하다. 잘못이라고 나무랄 수도 없고 내년부터는 고치라고 요구하기도 어렵다. 내버려두면 된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고 싶다. 어떤 말이 있을 때 그 말을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간격, 벽, 틈, 차별, 구별, 불통 같은 게 생기는 것을 종종 본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이와 칠순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 쓰는 말이 달라 세대 간 소통에 어려움을 겪듯이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한문을 배운 양반과 그렇지 못한 백성 사이엔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있었지.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거나 외국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그것은 진실일 테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 벽은 자기 쪽을 돋보이게 하고 멋지게 보이게 하고 뭔가 있어 보이게 하고 고상해 보이게 하는 기능을 한다. 반대로 벽 저쪽에 있는 사람을 낮추어 보게 하고 업신여기게 하고 무식하게 취급하게 된다고 본다. 말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급이 생기는 것이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단배식이란 말을 보면서 생각에 생각을 이어붙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논리적으로 보면 비약이고 이성적으로 보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묻어난 글이 되어버렸다. 요즘 정치권(중앙정치든 지방정치든) 하는 짓들을 보면, 그들은 일반 국민들이 쓰는 말과 다른 종류의 말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공상이고 상상이다. 같은 말을 쓰더라도 명백히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장난이고 농담이다. 그렇지만, 요즘 중앙정치든 지방정치든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이런 생각이 꼭 공상이고 상상이고 장난이고 농담이기만 할까 싶다. “당신들끼리 모여 담배나 많이 피우세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2015.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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