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랍’이라는 말이 있다. 어렵다. ‘있다’고 해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이 말을 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고 듣지 않고 사는 사람이 국민의 반 이상은 될 것같기 때문이다. 물론 짐작일 뿐이다. 뒤져보니 이런 기사가 있다. ‘평택시 구랍 31일 불우이웃돕기성금 이어져’라는 제목에 ‘평택시에 따르면 구랍 31일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만 밝힌 60대 초반의 한 시민이…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나온다. 그러면 ‘구랍’이란 무슨 뜻인가.
사전을 보니 한자로는 ‘舊臘’이라고 쓴다. 어렵다. 뜻은 ‘지난해의 마지막 달’이라고 한다. ‘구’는 대강 알겠는데, ‘랍’을 몰라서 또 찾아본다. ‘랍’은 ‘납향 랍’이다. ‘납향’은 무엇인가. ‘납일에, 그 한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과 그 밖의 일들에 대해 여러 신에게 알리는 제사’이다. ‘납일’은 무엇인가. ‘매년 말 신에게 제사지내는 날’을 가리킨다. 돌고 돌아 뜻을 새겨보니, ‘지난해의 마지막 달’이라는 뜻을 어렴풋이 알 듯하다. 그렇게 뜻이 퍼지고 번져서 ‘랍’은 ‘섣달 랍’이라고도 한다. 그래도 어렵다.
의문이 하나 생긴다. ‘구랍’, ‘납향’, ‘납일’이라고 하는 개념은 죄다 음력 아닌가. 음력 섣달을 ‘구랍’이라고 해야 하는데, 요즘은 상관없이 양력 섣달을 ‘구랍’이라고들 하는가 보다. ‘양띠해가 밝았다’ 하는 말도 엄밀히 말하면 음력 설이 지나야 쓸 수 있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음력과 양력을 섞어 쓰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좀 이상하지만 봐주기로 하자.
‘구랍’은 주로 신문에서 쓴다. 방송에서도 아주 간혹 듣게 되는데 요즘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신문에서도 예전만큼 자주 보긴 힘들다. 이 말을 쓰는 기자들도, 스스로 이 말을 잘 모를 테고, 써놓고도 이상하게 보였을 게 분명하다. 발음하기도 힘들다. 있긴 있는데 있다고 말하기 힘든 말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쓰면 될까. 그냥 ‘지난해 12월 31일’이라고 하든지, ‘지난달 31일’이라고 하든지, ‘지난 31일’, ‘지난 섣달 31일’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구랍’이라는 말은 보통 새해 초에 쓰는데 ‘지난 31일’이라고 바꿔 써도 바로 앞 달인 12월을 가리킨다는 걸 모두 안다.
몇 가지 더 생각해 본다. 왜 이런 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을까.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말을 씀으로써 쓰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려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구별은 대개 ‘나는 똑똑하고 너는 똑똑하지 않다’는 심리와 연결될 것이다. ‘나는 이런 말도 알아, 너희는 모르지?’하는 심리, 이건 잘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말이 사라지는 게 좋은가. 그건 판단할 수 없다. 말이 생겨나고 쓰이다가 사라지는 건, 어떤 생물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것과 같다. 태어나고 죽어가는 것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다. 말도 그렇다. 그저 스스로 그럴 뿐이다. ‘자연의 한 조각’일 뿐이다. 다만 거기에다 온갖 의미와 추억을 붙여 기뻐하고 슬퍼할 뿐이다.
(2015.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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