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개발 중에 있다” “그 사람은 지금 회의 중에 있다” “대책을 마련 중에 있다”라는 말을 한다. 말을 하니 나는 듣는다. 이 말을 들으면 귀가 멍해진다. ‘이게 무슨 뜻일까’하고 생각해 본다. 정말 모르고서 그러겠나. ‘왜, 언제부터, 어쩌다가’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되었을까 싶은 것이겠지. 잠잠하던 직업병이 도진다.
“무엇을 개발하고 있다”라고 하든지 “무엇을 개발 중이다”라고 해야 한다. “그 사람은 지금 회의를 하고 있다”라고 하든지 “그 사람은 지금 회의 중이다” 또는 “그 사람은 지금 회의에 참석 중이다”라고 하면 되겠지. 그러면 “대책을 마련 중에 있다”는 말도 당연히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라거나 “대책을 마련 중이다”라고 하면 된다. “대책을 마련 중이다”는 앞에 어떤 말이 오는지에 따라 좀 어색할 수도 있으니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 한 문장에서 ‘주인’이 하는 ‘행동’을 집중해서 볼 일이다. ‘중에 있다’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
어떤 행사에 가보면 사회자가 이렇게 말한다. “먼저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다음은 회장님 인사말씀이 있겠습니다.” 여기서도 ‘있다’가 딱 귀에 거슬린다. 말하는 사회자도, 행사에 참가한 청중들도, 더구나 인사말을 해야 하는 회장님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귀가 가려워진다. 결혼식장에 가면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주례사가 있겠습니다”라는 말을 꼭 듣게 된다.
행사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국민의례를 하는 것이니 “먼저 국민의례를 하겠습니다”라고 하든지 “국민의례를 하시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회장님께서 인사말씀을 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자연스럽다. 회장님이 말을 하지 않는데 인사말씀이 제 혼자 있을 수는 없다. 왜 분명 말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어떤 행위를 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그냥 그 행위만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대부분 그냥 넘어간다. “주례 선생님께서 주례말씀을 해 주시겠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나만 그런가.
근거를 대어 가며 조목조목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말은 영어를 번역하는 데서 온 게 아닌가 의심한다. ‘한다’라고 할 것을 ‘갖는다’라고 하고 ‘있다’라고 하는 건 우리말스럽지 않다. ‘만났다’고 할 것을 ‘만남을 갖는다’고 하고, ‘회의를 한다’고 할 것을 ‘회의를 갖는다’고 한다. 이건 영어 have 동사를 번역하면서 온 것 같다. 대부분 그렇게 설명한다. ‘있다’는 영어 be 동사를 번역하는 데서 온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꼭 남의 나라 말을 듣는 것 같기만 해서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어떻게 말을 하고 글을 쓰겠나. 뜻만 통하면 되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되지, 뭘 그리 따따부따 시비를 거는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말이란 건 도구이고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런 걸 자꾸 시비 걸면, 자주 하는 말이지만, 뒷방 늙은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겠지. 아니면 ‘또라이’라는 소리도 들을 것이다.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고 살려 쓰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 어떤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
201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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