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는 광고가 있다.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반드시 메모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비문이다. 즉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반드시 메모한 습관 덕분이었습니다.” 2가지가 문제다. 첫 번째, ‘메모하는’이라고 현재형으로 하지 말고 ‘메모한’이라고 과거형으로 해야 한다. 비문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것 때문이다. 두 번째 ‘때문입니다’는 ‘덕분이었습니다’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가 보다. 몇 달째 계속 이 광고가 라디오에 나오고 있다.
‘때문’은 ‘앞에 오는 말이 뒤에 오는 일의 까닭이나 원인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뜻대로만 보면 위 광고 문장이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 ‘때문’이라는 말은 나쁜 일, 바라지 않던 일, 문제가 있는 일에 쓴다. 이건 사전의 뜻풀이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써온 언중들의 언어습관이다. “국민들이 이렇게 힘들어진 건 대통령을 잘못 뽑았기 때문이다.”라거나 “내 가슴이 시퍼렇게 멍든 것은 나를 버리고 떠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몇 해 전 광고에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라는 게 있었는데, 맞게 쓴 경우이다.
그러면 ‘때문’ 대신에 좋은 일, 바라던 일의 경우에 쓰는 말은 무엇인가. ‘덕분’이다. “우리나라 문맹률이 낮은 것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신 덕분이다.”처럼 쓰면 된다. ‘때문’은 순우리말이고 ‘덕분’은 한자어이긴 하다. 그래서 순우리말을 살려 쓰자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는 고민이 더 필요하겠다. 어쨌든 ‘때문’은 안 좋은 일에, ‘덕분’은 좋은 일에 쓰는 게 어울린다.
이렇게 멀쩡한 낱말이 언중 사이에서 오랜 세월 쓰이면서 좋은 의미 또는 나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다른 보기로는 ‘장본인’이라는 말이 있다. ‘장본인’은 ‘어떤 일을 빚어낸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한 데에 쓰인다. “옛 한나라당 이○○ 후보 장남의 병역비리 은폐 의혹을 제기한 이른바 ‘병풍(兵風)’ 사건의 장본인 김○○ 씨(52)가 경찰 수사를 무마해주겠다며 돈을 받아 챙긴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검찰에 20일 체포됐다.”라는 신문 기사가 보이는데, 맞게 쓴 경우이다.
그러면 좋은 의미로 쓸 때는 어떤 말을 쓸까. ‘주역’, ‘주인공’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기사 제목이 보인다. “곽○○ ‘슈퍼스타K6’ 5억 주인공, 김○ 누르고 우승확정” 이렇게 쓰면 맞게 쓴 경우이다. 반대로, “김○○ 별세, 태○○와 남다른 인연 ‘재조명’…‘김○○을 만들어준 장본인’”처럼 쓰면 곤란하다. 태○○가 김○○이 잘되도록 도와준 것이므로 ‘장본인’이라고 하기보다 ‘주역’이나 ‘주인공’이라고 쓰는 게 어울린다. 자칫하면, 좀 비약이긴 하지만, 태○○가 김○○을 나쁜 길로 인도한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때문’이라고 쓸지, ‘덕분’이라고 쓸지 1초만 생각하면서 말하면 말 잘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장본인’과 ‘주인공’을 잘 가려 쓰면 말 잘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말을 바꿔 쓰더라도 ‘명백히’ 틀렸다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잘 가려 쓰면 좋겠다. “이런 말을 잘 가려 써서 글 잘 쓰는 사람, 말 잘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을 받는 ‘주인공’이 된다면, 그건 바로 제 ‘덕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2014.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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