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맘때, 그러니까 기온은 갑자기 뚝 떨어지고 어디 오라는 데는 없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심심해 죽겠는데 잠은 안 오고, 하릴없이 배가 실실 고파질 저녁 10시쯤 라면 하나를 툭 분질러 냄비에 넣고 달걀 하나 퐁당 빠뜨리고 대파 대충 썰어 넣어 보글보글 끓여 먹는 라면의, 그 감격스러운 맛을 아는가. 라면 맛에도 찰나의 미학이 있으니, 젓가락으로 라면 20~30가락을 잘 휘감아 집어 쑥 뽑아 올려 한입에 먹을 듯 입을 가까이 대고는, 마치 시속 90km를 한참 동안 달려 꽃사슴 한 마리를 잡아챈 수사자가 혹시 주위에서 하이에나가 기회를 노리고 있지나 않은지 고개 돌려 살펴보듯, 후~ 살짝 바람을 한 번 불어 줄 때 그 짧은 순간 느껴지는 혀끝의 설렘과 코끝의 향기와 어쩔 수 없이 미동을 하고 마는 젓가락 쥔 손의 미세한 떨림, 그 찰나의 감격을 어찌 모를 것인가.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어도 라면 먹고 싶은 건 참을 수 없다.’는 명언 같지도 않은 명언을 남긴 지인도 있으려니와, 라면이라는 말만 들어도 귀가 쫑긋 서고 입에서 아밀라아제가 분출되며 두리번두리번 젓가락부터 찾게 되는 건, 초절정 입맛공학적으로 제조된 스프의 구수하고 얼큰하고 짭짜름한 맛과 야들야들 고불고불한 면발 곡선의 아름다움이 수십 년 동안 뇌리에 박혀 있는 덕분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 국민간식이라는 헌사에 걸맞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군들 라면에 얽힌 추억이나 일화나 사연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 가슴 시린 이야기와 조금은 재미적은 추억이 있으니, 라면 생각만 하면, 라면이라는 말만 들으면 언제나 그 시절로 마음 먼저 돌아가 있곤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저녁 10시 30분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뒤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11시 넘어가는 시각인데 6시쯤 먹은 저녁 도시락밥은 이미 방귀로 새어버린 지 오래인지라 뱃속에서 꼬르륵 꾸르륵 난리 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더 잘 아는 어머니는, 날마다 과일이다 떡이다 과자다 주스다 뭐다 내놓을 수 없어 고민과 걱정 끝에 누구나 다 좋아하는 라면이라는 기상천외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는데, 문제는 저녁 일고여덟 시쯤 갈아 넣은 연탄이 아래 연탄에서 위 연탄으로 불이 올라오지 않아 라면 하나 끓이는데 이삼십 분은 족히 걸리는 것이어서 부엌에서 아주 천천히 퍼져오는 라면 냄새에 나는 배가 더 고파지고 라면은 라면대로 더 불어 12시쯤 젓가락 숟가락을 놓을 땐 나도 모르게 밥도 한 그릇 뚝딱 먹어버렸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라면에는 수험생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지극한 애정이 스프보다 깊은 맛으로 면발보다 긴 정으로 스며들어 있었다고 아니할 수 있겠나.
일요일 낮에 동생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명랑 운동회’, ‘한 지붕 세 가족’ 따위를 보며 놀다가 때가 되어 라면을 끓여먹기로 하고, 형이라서라기보다는 부엌 드나들기를 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하는 내가 당연히 라면을 끓이는데 라면봉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보다 더 멋지고 폼 나고 맛나게 잘 끓여 밥상에 놓고 김치며 식은밥까지 알뜰히 살뜰히 챙겨 마주앉는 순간, 동생이 언제나 냄비 뚜껑을 먼저 잽싸게 챙겨 라면가락을 대량으로 신속히 식혀 제 배를 불리는 것까지는 그래도 동생이니까 봐줄 만하다 치고, 차린 건 내가 했으니 치우는 건 네가 하라고 하면 동생은 차린 사람이 치우는 거 아니냐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힁허케 달아나버리는 게 아닌가. 그런 황당무계한 일을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었으면서도 매번 라면 끓이는 일을 내가 스스럼없이 하게 된 것을 보면 내가 라면을 더 좋아하였던 게 분명하다 아니할 수 없고 그로부터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라면은 내 담당이 될 것을 미리 정하여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할 따름이라.
일요일 아들과 단둘이 텔레비전 앞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일이 그리 잦지 않은 편이라 모처럼 부자간의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될 게 빤한 날, 밖으로 나가 국수나 칼국수를 사 먹든지 아니면 짜장면을 시켜 먹을지 물으면 아들은 “라면 삶아 주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는지라 ‘예나 지금이나 라면 당번은 나로구나.’ 하며 산 채로 냉동실로 직행한 새우를 너덧 마리 넣고 표고버섯 썰어 넣고 두부도 깍둑 썰어 넣고 달걀은 두 명이 하나씩 먹도록 두 개를 노른자 안 퍼지게 넣고 대파도 송송 썰어 넣어, 본명은 그냥 라면이로되 감히 라면전골이라 칭하여 대접하여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국내 단 하나뿐인 최고명품 라면요리를 내놓았던 것 아닌가.
아, 그런데 아들은 라면을 몇 젓가락 먹다가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더니 으웩 으웩 토악질을 해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아무 문제없이 잘도 먹었는지라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아들은 처음엔 새우 맛이 이상했다고 하다가 좀 있다가 버섯 냄새가 구역질나게 한다고 했다가 종잡을 줄 모르는데, 부자간의 아름다운 장면은 고사하고 자칫 조금 더 잘못되었더라면 응급실로 직행할 뻔하지 않았던가. 그 뒤 아들은 새우도 잘 먹고 버섯도 아무렇지 않게 먹긴 하는데 그날 나의 라면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고, 그때 부자간의 아름다운 추억을 영원히 남기기도 해야 했지만 당장 제 어미한테라도 보내려고 젓가락 들이밀기 전 미리 찍어놓은 사진이 오늘밤 스마트폰 사진첩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 길고 추운 이 밤 라면 가락보다 더 긴긴 라면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이렷다. 2014.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