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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봉쇄

by 이우기, yiwoogi 2014. 12. 2.

봉쇄라는 말이 있다. 문이나 길 따위를 굳게 잠그거나 막아서 드나들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출입문 봉쇄’, ‘도로 봉쇄처럼 쓴다.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했다라고도 쓴다. 한자로는 封鎖이렇게 쓰는데, 자물쇠나 쇠사슬로 봉한다는 뜻이다. 자물쇠나 쇠사슬이라는 금속의 느낌은 차갑고 딱딱하고 매몰차다. ‘라는 한글도 시각적으로 답답하고 청각적으로는 갑갑한 느낌을 준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이 글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봉쇄하려는 쪽의 마음이다. 그들은 일단 막아야 한다. 드나들지 못하게 해야 하고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물샐 틈도 용납하지 않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은 대개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연결된다. 질문을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 말고 무조건 따르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기도 하다. 봉쇄하려는 쪽은 힘이 셀 것 같다. 힘이 센 쪽은,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커다란 비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봉쇄당하는 쪽의 마음도 생각난다. 이들은 어떻게든 달아나고 싶어 한다. 뚫고 나가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어진다. 같은 것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게 더 멋있고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물샐 틈이라도 있으면 어떡하든 새어 나가려고 한다. ‘라는 말을 늘 달고 다닌다. 봉쇄당하는 것은 곧 질식사를 뜻하는 것 같고 굶주리는 것만 같다. 작은 구멍이 보이면 손가락을 집어넣어 구멍을 점점 더 크게 하고 싶고, 봉쇄하는 쪽이 잠시라도 한눈팔지나 않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우리는 오랫동안 봉쇄당하는 일에 익숙해 왔다. 학생 때는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교실은 봉쇄된 공간이었다. 직장에서는 임원회의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지 알 수 없었다.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사무실도 사실, 봉쇄돼 있긴 마찬가지이다.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심각한 회의를 하고 최종 결정을 하는데도 앎을 봉쇄당한 채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지방에서는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 수 없다. 큰돈을 만지고 큰 결정을 하는 사람은 서울에서 스스로 입을 봉쇄해 버렸다. 하지만 이건 잘못이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귀가 정보로부터, 알권리로부터 봉쇄당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인터넷 속에 망망대해로 펼쳐져 있는 토론공간은 봉쇄당했다. 돈 들지 않고 무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카카오톡도 봉쇄당했다. 신문에 쓰는 글도, 방송에서 떠드는 말도 봉쇄당했다. 봉쇄당한 건 무엇인가. 내 생각, 내 의지, 내 마음, 내 의견, 내 주장, 내 논리, 내 희망, 내 꿈, 내 자유이다. 이것들은 인터넷에서조차 마음껏 새어 나가 자유롭게 뛰어놀아질 수 없고, 카카오톡에서도 마음대로 재잘대어질 수 없고, 신문, 방송, SNS에서도 마음 가는 대로 지껄여질 수 없다. 많은 이들은 봉쇄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를 겹겹이 봉쇄한 거대한 쇠사슬은 누구의 것일까. 우리를 봉쇄해 놓고 거대한 사기를 치고 엄청난 비밀을 거래하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의 눈과 귀를 봉쇄해 놓고 저희들끼리 분탕질하는 이들은 또 누구인가. 그리고 쇠사슬의 봉쇄를 끊기 위해 싸우는 이들은 누구이며, 봉쇄의 자물쇠를 열기 위한 자유의 열쇠를 움켜쥔 이는 또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던져본다. 2014.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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