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파하여 집에 가도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이다. 바로 앞집이 점방(가게)이긴 했지만 주머니엔 땡전 한 푼 없는 날이 더 많았다. 10원, 20원 하는 과자가 더러 있긴 했는데 그만한 용돈도 소풍 때나 명절 말고는 손에 쥘 수 없었다. 오후 서너 시, 햇살은 비스듬히 누워 감나무 가지 사이로 부서지고 찬바람은 코끝에 맺혀 고뿔을 만들 기세였다. 집에 간댔자 먹을 게 없는 줄 뻔히 아는 우리들은 남의 묵정밭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무를 뽑아 베어 먹곤 했다.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산으로 나무하러 간다. 요소비료 한 부대에 삭정이나 썩둥구리 하나 가득 쟁여 넣고는 새끼줄로 얼기설기 묶어 어깨에 걸치고 집으로 향한다. 삐죽 비집고 나온 가지가 등을 찔러대도 얼른 집에 가서 뭐라도 좀 먹고 싶은 생각에 부대를 다시 단속할 겨를이 없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사위가 어두컴컴한데 할 일은 쌔고 쌨다. 형제들은 작두를 끄집어내어 짚단을 썰어 여물을 끓인다. 가마솥 아궁이에 솔가지와 장작을 넣어 눈이 매콤하도록 불을 때다 솥 시울에서 눈물이 나고서야 불을 끈다.
작은방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가마니에서 고구마 열댓 개를 갖고 와 장작 숯불 사이에 조심스레 넣고는 재로 덮는다. 그때쯤 아버지, 어머니는 온몸에 흙냄새, 바람 냄새를 풀풀 날리며 돌아오곤 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밥 눋는 냄새와 시래깃국 멸치 냄새가 번져 나오면 뱃속은 환장을 한다. 부지깽이로 숯불 사이를 뒤져 고구마를 꺼낸다. 조금만 참으면 밥을 먹을 테지만 그 잠시 동안을 참을 수 없어 군고구마 껍질을 벗긴다.
고구마는 알맞게 익었다. 껍질은 까맣게 타고 속살은 노르스름한 빛이 돈다. 개나리 빛깔 같기도 하고 치자 빛깔 같기도 한 게 일정하지 않다. 한입 베어 물면 입 안에 아직 남아 있던 무 냄새가 가시는 것은 물론, 향긋한 군고구마 향이 머릿속에서 코를 지나 입에서 맴돌고 다시 목젖을 타고 내려가 위장에서 요동친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극한 맛의 경지를 느낀다. 입천장 덴 줄도 모르고 한입 더 물컹 베어 문다. 탄 고구마 검정이 손가락 끝에 시커멓게 묻었다가 입안으로 달려 들어온다. 그마저 구수하다.
그날 밤, 호롱불 밑에 엎드려 숙제를 하는데 어머니는 동치미 국물과 군고구마를 내어온다. 김장김치가 나올 때도 있다. 군고구마 야참을 먹는다. 아버지는 묻는다. “우기야, 이 세상에서 뭐가 제일로 맛있노?” 나는 잠시도 생각지 아니하고 곧바로 대답한다. “고매예!” “그기 그리키나 맛있나?” “예.”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면 먹는 일에 집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건 군고구마였다. 라면도 없고 만두도 없고 떡볶이가 뭔지 모르고 족발도 모르던 시절이다. 여름엔 엉머구리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었고, 그 겨울에도 감자나 알밤은 있었건만 군고구마가 단연 으뜸이었다. 긴긴 겨울밤 여섯 가족이 둘러앉아 오순도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 ‘그것이 모든 것’이던 때이다. 삶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지 몰라도 되었고, 돈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군고구마 몇 개에다 동치미 국물만 있으면 온 세상 다 가진 것만 같던 시절이다. 2014.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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