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민의 아들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진양군 미천면 안간리 숲골마을이다. 숲골은 나중에 ‘임곡’으로 바뀌었다. 한자숭배자들의 짓이다. 일제 강점기를 그리워하는 자들의 흉계다. 농민들의 바람대로 바뀐 이름이 아니다. 우리 집은 땅이 많지 않았다. 보리, 고구마, 감자, 옥수수 따위를 심을 밭 몇 뙈기와 나락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이 조금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여섯 식구 ‘먹고 살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세간을 하나씩 장만하려면 더 많은 논과 밭이 필요했다. 우리는 동네 부잣집으로부터 논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소작농이었다. 부자는 왜 부자인가 했더니, 일본에 있는 친척이 엄청난 돈을 부쳐준다고 했다. 텔레비전을 동네에서 가장 먼저 샀다. 집은 으리으리했고 넓은 마당 가운데 깊은 우물이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그 집에 가서 삯바느질을 했고, 직접 짠 베를 그 집 아주머니에게 갖다 주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리 없었고, 우린 왜 일본에 친척이 없을까 불만이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했는데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작논에서 나는 쌀은 땅주인에게 절반 가까이 ‘갖다 바친’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꼴 베러 가거나 나무 하러 산으로 돌아다녔다. 뭔가 하나라도 하지 않으면 밥 먹기 미안하던 시절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진주로 이사했다. 이사하면서 우리 논밭을 처분했는데 진주에서는 친척에게 목돈을 빌려서야 전세방 두 칸을 겨우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집에는 낫ㆍ호미ㆍ쇠스랑ㆍ괭이ㆍ쟁기ㆍ탈곡기ㆍ도리깨ㆍ작두ㆍ톱 따위 농기구는 있었지만 경운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농민의 삶을 배웠다. 농민의 삶이란, 고달프고 힘겹지만 땅을 믿고 하늘을 보며 내일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것이다. 양력 달력을 그렇게 많이 뿌려대고 이중과세(二重過歲)를 금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도, 달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조상 대대로 알고 있다. 농민은 뿌린 만큼 거두는 땅의 진리를 안다. 간혹 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이웃 간 다툼을 벌이고 긴 겨울밤 화투놀이로 가산을 탕진하는 못난이도 나오지만, 도시 사람들 범죄에 견주면 조족지혈이다. 논두렁 밟는 주인 발소리를 들으며 나락이 자라고, 밥이 사람 입에 들어오기까지는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가야 하는 줄 알기에 누구보다 쌀과 밥을 귀히 대한다. 겨울이면 낫, 도끼를 벼리고 여름이면 나무그늘 아래서 육자배기 한 자락 읊는다. 해거름이면 소여물부터 먹이고 집 지키는 개에게도 가끔은 돼지 뼈다귀를 먹인다. 소를 얼마만큼 키워야 아들 등록금이 될지 송아지를 살 때부터 가늠하고, 머리가 깬 자식들은 대처로 보내 더 먼 미래를 설계한다. 밭두렁에 미루나무를 심어 헛간 지을 목재로 사용했고 야산에는 소나무를 키워 서까래로 썼다. 사과도 심고 배도 심었고, 집 뒤 텃밭에는 풍개나무를 심었는데 수십 년 동안 한철 간식이 알뜰했다. 손자의 손자를 위해 저수지를 파고 영원히 살기 위해 묏자리를 살핀다. 세금 내라고 하면 두말없이 갖다 바치고, 아들은 군대를 보내야 사람 되어 오는 것으로 믿을 만큼 순박하다. 하지만 농민들은 나라가 잘 못하여 먹고 살기 정말 어려워지면 죄다 들고일어나 싸움에 나선다. 소작주인이 횡포를 부리면 조선낫을 들고 가 거칠게 따지지만, 정녕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 끝에 서게 되면, 아뿔싸, 모든 게 내 탓이로구나 탄식하며 농약을 마셔버린다. 남 탓만 하는 자본가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착하고 슬기롭고 부지런하지만 수틀리면 무서운 사람이 농민이다.
‘MBC컨벤션’ 화장실에 붙어 있는 사진은, 처음 본 게 아니다. 진주시내 곳곳 공중화장실에 붙어 있다. 서서 오줌을 누면서, 앉아서 똥을 누면서 아주 많이 봐왔다. ‘세기를 내다보는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20년쯤은 내다봐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속으로는 ‘농사를 안 짓기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오늘 누군가 써 놓은 ‘그래서 농민 어쩌라고?’라는 일갈을 보고서 나는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혔다. 그래서 농민 어쩌라고? 농사를 포기하라고? 기껏해야 1년밖에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니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있으라고? 미국, 중국, 유럽,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든 말든 그냥 가만있으라고?
누군가 써놓은 낙서 하나를 보고서, 어떤 말이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차이 나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관청 넓은 책상머리에 앉아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알겠다. 일부러 농민을 깔보고 업신여기려고 쓴 말은 절대 아닐 테지만, 어디 명언사전에 나옴 직한 말일 뿐이겠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14.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