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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은행잎

by 이우기, yiwoogi 2014. 11. 24.

신안동 어느 빵집 근처 건널목 앞에 서 있었다. 저녁 7시가 되기 전이었다. 나는 신호등 색깔이 바뀌면 건널목을 건널 것이었다. 자동차는 전조등을 비추며 쌩쌩 달렸다. 버스도 지나가고 자가용도 지나가고 택시도 내달렸다. 가로등 불빛과 근처 가게 네온사인이 자동차 불빛과 뒤엉겨 휘황찬란했다. 바람은 거의 없었고, 하늘엔 달이 있는지 별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저녁이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순간이었다.

!” 나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 가벼운 물체가 느닷없이 아스팔트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뾰족하거나 둥근 물체가 아니라 얇고 가벼운, 손바닥만 한 것이 내는 소리였다. 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 하는 소리와 !” 하는 소리의 간격은 1초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영원을 가로지르는 좁은 틈이었고, 수억 광년을 단숨에 건너뛰는 찰나였다.

노란 은행잎 하나가 내 왼쪽 발 앞에 떨어졌다. 은행잎은 크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가을이 갔다!”라고 했을까, “워메, 단풍!”이라고 했을까, “나 죽네!”라고 했을까. 은행잎 하나는, 내달리는 택시와 버스와 자가용 자동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몸을 내던진 것일까. 진양호에서 천천히 불어오는 초겨울 바람에 일편단심 온몸을 내맡긴 것일까. 은행잎은 그 넓이와 그 가벼움과 그 예쁜 빛에도 아랑곳없이, 그것과는 아예 상관없이 수직으로 내리꽂혀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 하면서, 삶을 느꼈다. 인생을 봤다. 머릿속에 번갯불이 튀었다. 인생은, 삶이 다할 즈음 바람에 하느작하느작 살랑살랑 푸들푸들 떨어지는 나뭇잎이 아니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길바닥에 패대기쳐지듯 내동댕이쳐지듯 무대책으로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은행잎이 그날 그 시간에 그렇게 느닷없이 떨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듯이, 우리 인생도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속절없이 하는 번개를 뒤통수에 맞고 스러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삶은 그렇게 마감되는 것 아닌가 하는.

스스로는, 병에 걸려 병원에 가고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지랄발광을 떨지만, 멀리서 더 멀리서 크게 더 크게 보면, 인간의 삶은 어느 순간 회오리도 없고 소용돌이도 없는데도 그저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떨어져 하직하고 마는,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호등 색이 바뀌어 차들이 비추어주는 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휘적휘적 길을 건너갈 때,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허망함과 고독함 그리고 쓸쓸함을 느끼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은행잎은, 커다란 버스의 둥그런 바퀴에 짓이겨져 잠시 동안 그것이 거기에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참혹하게 모든 흔적을 마감하던 것이었는데, 우리 인간의 삶은 그러한 은행잎과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 싶어 발걸음이 자꾸 멈추어지던 것이다. 2014.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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