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언젠가는 종말이 오겠지. 태곳적부터 영원한 것이란 없었으니. 그러면 언제쯤 종말이 올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쩐지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징후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기상이변이다. 북극 얼음이 녹아 북극곰이 익사한다는 이야기나,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진, 화산폭발 같은 것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여름에 폭설이 내린다거나 한겨울에 태풍이 분다거나 하여간 지구 환경은 곧 뭔가 ‘큰 것’이 도래할 것임을 꾸준히 예고하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아직도 유효한지 모르겠고 종말론자들이 예언한 휴거가 여태까지 개연성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그런 가운데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종말을 상품으로 팔아먹는 사람은 쌔고 쌨다. 종말이 왔을 때 ‘노아의 방주’를 타기 위해 이러저러한 종교를 믿으라고 설교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잠시 지구를 떠났다가 대환란이 끝난 뒤 되돌아올 수 있다며 우주선 승선권을 파는 사업가도 있다고 한다. 그것을 믿거나 안 믿거나 그건 오로지 개인의 자유이겠지. 아무튼 지구의 종말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류의 종말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만 같다. 인류의 종말과 지구의 종말은 과연 다른 것인가. 만일, 인류의 종말이 온다면 그것은 강대국들 간의 핵전쟁으로 인하여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앞다투어 개발하는 것으로 인하여 인류가 멸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류는 서로 다른 종족이나 종교가 다른 교도들이나 국가가 다른 국민을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두 파멸하는 길을 걸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슈퍼 바이러스나 에이즈 같은 불치병으로 인하여 인류가 멸종의 화를 입을 위험성도 그다지 높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 그중에서도 의학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고 있으니…. 그 이면에 감춰진 자본의 논리는 여전히 문제이지만. 그러면 인류의 종말은 어떻게 올 것인가.
11월 마지막 주는 가을이라고 하기엔 아주 춥고, 겨울이라고 하기엔 엄살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로 보자면, 강원도 산간에는 눈이 30센티미터 이상은 쌓였을 테고, 아무리 남쪽지방이라고 하더라도 서리가 몇 번은 내렸음 직한 시기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엇이든 겨울나기 채비를 마무리지을 즈음인 것이다. 그런데도 따뜻한 봄날에, 그것도 한참을 망설이다 마지못한 듯 피어나야 제격인 영산홍, 진달래, 목련, 개나리 들이 철딱서니 없이 불쑥불쑥 피어나고 있다. 참, 신기한 일이고 안타까운 사태이다.
인류의 종말은, 감히 생각해보자면, 엄동설한을 앞둔 시절에 겁도 없고 대중도 없이, 더구나 개념도 없이 피어나는 봄꽃들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쳐가는 우리들의 무심함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닐까. 주차장 가에 피어난 영산홍을 보면서, 저것이 지금 저렇게 꽃망울을 터뜨린 것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고, 지구 온난화는 우리가 무작정 태워 없애는 에너지 탓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 아닌가. 그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미국과 같은 큰 나라들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규제하기 위한 국제적 약속인 ‘도쿄의정서’ 같은 데 참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없는 영산홍 한 송이를 보면서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다함께 죽을 길을 갈 것이 아니라 다함께 생존하는 길을 선택하자고 미국을 압박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를 뽑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 것을 모르거나, 모르고서도 모르는 줄도 모르는 무심함 사이에 인류의 종말은 서서히 알게 모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닐까. 인류의 종말은 곧 지구의 종말이라고 하지 않을 것인가.
비 그친 뒤 조금 포근한 듯한 초겨울 바람 속에 대책 없이 피어난 영산홍을 보게 된 날, 조금 더 나무에 매달려 있어도 전혀 부끄러울 게 없을 단풍잎이 미련 없이 낙화(落花)한 것을 보면서, 그 사이에 놓인 깊고 오랜 인류사적 문제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해괴망측한 생각이 들어 몇 자 적어 놓는다. 2014.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