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시장에 가면 5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어주시던 기름장수 할머니께서 운명하신 건 1992년 12월이다. 연말이라 억병으로 취하여 새벽 2시쯤 들어가니 온 집안이 고요했다. 시골에서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았다. 마루에서 엉엉 울었다. 큰형은 작은방에서 자다 깨어 “저녁에 또 위독하다 해서 아버지, 어머니는 시골 가셨다. 아직 안 돌아가셨다. 들어가 자라.”고 했는데 아침 7시에 나를 흔들어 깨우며 “할머니 돌아가셨다. 빨리 가봐야 한다. 얼른 정신 차리라.”고 했다. 말년에 다리가 불편하여 걷지도 못하고 시력을 잃어 앞도 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먼먼 저승길 어떻게 걸어가셨을까. 젊은 나이에 사별한 할아버지가 마중 나왔다 한들 서로 알아보기는 했을까.
할머니의 손자 손녀 가운데 사촌동생이 몇 해 전 마흔하나의 나이로 요절했다. 간암으로 2년 남짓 힘겹게 싸웠으나 결국 안타깝게 되고 말았다. 술을 못하던 그가 술집을 운영하며 또 이런저런 단체의 대표를 맡으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뒤에 알았다. 진양호 노을공원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그의 사진을 찍어주며 마주보고 씩씩하게 웃었는데 그다음 해에 발병 사실을 알았다. 산청군 내대에서 요양하는 그를 문병했을 때는 되레 우리를 위로했고 나중에 아파트에서 만난 그는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세상을 뜨던 시간쯤 그는 내 귓가에 “형, 나 먼저 간다.”고 속삭였다. 꿈인지 생각인지.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나는 잠시 뒤 부고문자를 받았었다. 진주에서 중ㆍ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우리 집에서 살았는데, 정이 각별했다. 그는 1남 1녀를 남겼다.
당숙어른은 훨씬 일찍 돌아가셨다. 술을 너무 좋아한 당숙은 어느 해 추석 다음날 각혈하며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다. 추석 며칠 전부터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너무 많이 마신 듯했다. 시골집 마당에서 장례를 치를 때 나는 한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모든 장면을 보았다. 죽음은,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다시는 절대 못 보게 되는 ‘끝’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당숙모는 그 후 한참 동안 건강하게 사시다가 몇 해 전 돌아가셨다. 마지막엔 진주의료원 6층 노인 병동에 계셨는데, 문병하는 우리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 당숙어른의 동생은 지난여름 돌아가셨다. 부산에 있는 어느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몇 년이나 되었을까. 진주에 살 때 하루거리로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와 소주병을 비우던 분이다. 의좋게 잘 놀다가도 삐쳐서 싸우기도 했고 어떤 때는 우리 집에서 주무시기도 했다. 깨어 있는 날보다 취해 있는 날이 많았다. 재종형 내외의 지극한 효심 아니었으면 마지막까지 현대 의료 기술과 간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싶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2012년 10월 인사드리러 갔을 때 정신이 말짱했었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 문병 다녀온 친척들도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 정말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아버지 돌아가신 소식 듣고 와보지는 못해도 가장 슬피 울었을 당숙이다.
가까운 혈육이 순서 없이 맥락도 없이 세상을 떠난다. 살아계신 어른들도 모두 연세가 많아 건강이 온전치 못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 때 살아남았고 보릿고개를 넘어 새마을운동으로 우리를 먹여 살린 어른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뜨신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 들으면 찾아뵙기는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왔다 갔다 할 시간도 없을 테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게 어른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주말, 늦은 밤, 또는 이른 새벽에 갑자기 걸려오는 큰형이나 어머니의 전화는 항상 나를 긴장시킨다. ‘혹시나’ 해서. 일가붙이라 해도 아픈 이야기, 병원 간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다 전하지 못하고, 다 전한다고 해도 일일이 찾아뵙지 못하는데 죽음 소식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안했는데 그렇게 찾아오곤 한다. 2014.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