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요금 170원, 학생식당 밥 500원, 국수 300원 할 때다. 1986~7년이다. 하루 용돈은 1000원이었다. 한 달 치 삼만 원을 한 번에 받는 일은 없었다. 1000원으로 승차권 두 장 사면 660원이 남았다. 점심으로 밥을 먹으면 160원 남고 국수를 먹으면 360원이 남았다. 친구 몇이서 그렇게 잔돈을 모아 보무도 당당하게 막걸리 집 문을 열곤 했다. 돈 모자라면 외상 긋는 것도 그즈음 배웠다. 학교 앞 식당에선 라면도 막걸리도 300원 하고 파전은 500원, 고갈비는 1000원 하던 시절이다. 시골에서 유학 온 친구의 ‘향토장학금’ 1만 원을 거덜내기도 했다. 그런 날엔 두툼한 돼지고기와 두부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를 호기롭게 시켜먹었던가.
그러면 그 친구의 점심은 어떻게 했을까. 넷이 모이면, 일단 국수 세 그릇을 시킨 뒤 한 명이 몇 초 만에 후루룩 마셔버린 후 빈 그릇을 들고 가서 추가로 좀더 달라고 한다. 양이 안 찬다며…. 아주머니들은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며 국수 한 그릇을 더 주곤 했다. 밥도 그랬다. 자율배식이 아니어서 주는 대로 받아먹는데, 최대한 많이 달라고 갖은 아양을 다 떤다. “엄마, 엄마~” 하면서…. 네 명 몫으로 다섯 명이 먹기도 하고 여섯 명이 먹기도 했다. 실제 돈이 없어 점심을 ‘빈대 치는’ 학생도 제법 많던 시절이다. 끼니는 그렇게 때우면서도 막걸리는 두 병에 사이다 하나를 꼭 타야 했다. 매콤 고소한 파전을 짭조름한 간장에 찍어먹으며, 깍두기를 아삭아삭 씹어먹으며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추억의 백마강’ 같은 노래를, 나무젓가락 장단에 맞춰 목이 터져라 부르곤 했다. ‘농민가’나 ‘동학농민가’ 같은 민노래를 부르기도 했지.
그 시절, 학교 근처 자취방에 가 보면 학교 이름이 선명히 찍힌 수저가 대여섯 벌씩 나오기 예사였고 학교 식판도 보란 듯이 찬장에 꽂혀 있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강의실 커튼을 뜯어 이불로 쓰는 학생도 있다고 했다. 학교 물품을 쓰던 학생이 졸업할 때 뒤에 들어올 자취생에게 대물림해 주었으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그게 무슨 보물이나 되는 양 졸업 후 취업을 갈 때도 갖고 가곤 했다. 하니, 학교에서는 숟가락 젓가락을 해마다 새로 장만해야 했겠지. 그래도 크게 문제화하거나 시빗거리로 번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세상에 이런 장난을 치다가 걸리면 어찌 될까. 경찰서엘 보내기까지야 할까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장난질을, ‘학생이니 그렇겠거니 하며 보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이제 성인의 나이이니 그런 장난은 그만해야 한다고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할까’ 하는 것도 고민일 수 있겠다. 모르긴 해도 우리 학창시절 어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저 놈들을 혼구멍을 내어 눈물을 쏙 빼게 해줄 것인가’ 아니면 ‘한때의 장난이 나중에 추억이 될 것이니 모른 척 놔둘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떤 게 더 교육적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련한 추억이다. 젓가락 위치이동 좀 했다고 그 길로 도둑이 된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그걸 석고대죄 반성하며 법석 떠는 친구도 물론 없다. 그저 그렇게 재미있게 또는 어렵게 학교생활을 했더랬다. 그래서 그런지, 막걸리에도 파전에도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게 하는 추억이 어려 있다. 국수를 먹을 땐 국수 한 그릇을 정말 1분도 안 걸리고 ‘마셔버리던’ 묘기가 씁쓸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해거름 출출한 속을 다스리려 학교식당에서 2000원짜리 라면+밥을 먹으며 잠시 옛 추억에 잠긴다. 2014.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