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340000000000원

by 이우기, yiwoogi 2014. 9. 16.

정부가 제때 받아내지 못하고 시효가 만료된 추징금이 최근 5년 동안 3400여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연합뉴스 2014910일 보도)고 한다. 이어 <연합뉴스>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의원이 법무부에서 받은 추징금 결손처리 내역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7월까지 시효 만료로 환수하지 못한 추징금은 9611, 34288700만원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이 아까운 돈 3400억 원을 숫자로 길게 써 놓고 한번에 위에서부터 끝까지 읽어보자. ‘340000000000어렵다. 그래서 중간 중간에 쉼표를 찍는다. 이렇게. ‘340,000,000,000, 이 숫자를 위에서부터 끝까지 한번에(2~3초 만에)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뒤에서부터 일, , , , , 십만천억, 이렇게 세어 올라가서 다시 거꾸로 읽어나간다. 나만 그런가.


어떤 분들은 이렇게 쓴다. ‘340,000,000천 원단위가 천 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숫자를 위에서부터 바로 읽어낼 수 없다. 역시 천, , 십만천억, 이렇게 세어 올라갔다가 다시 읽어나간다. ‘, , 을 읽을 0.5초는 줄였다. 역시 나만 그럴까.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도 쓴다. ‘34,000,000만 원이번엔 단위가 만 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숫자 역시 한번에 읽을 자신이 없다. 위 기사처럼 ‘3400억 원이라고 쓰든지 ‘3400억 원이라고 쓰면 좋겠다. 다행히 대부분 언론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고맙다.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1억 넘는 숫자를 한번에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런가. 무턱대고 서양식을 따라 세 자리마다 자리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 자리마다 싸우전드(thousand), 밀리언(million), 빌리언(billion), 트릴리언(trill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 나라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이렇게 배운다. 자기들끼리는 전혀 어려운 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원래 네 자리마다 새로운 자리이름을 붙여서 읽어 왔다. 네 자리마다 자리이름을 줘 보자. ‘3400,0000,0000뒤에서 첫 번째 쉼표는 , 두 번째 쉼표는 을 가리킨다. 쉼표 두 개만 딱 보고 3400억 원이라는 말이 나온다. ‘34,000,000만 원‘3400,0000만 원처럼 쉼표 위치만 옮기면(, 만 단위로 띄어 주면) 훨씬 쉽다. ‘만 개모이면 이 되고, ‘이 또 만 개모이면 가 된다. 곱하기, 나누기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진다. 우리말에서 숫자를 쓰고 읽는 규칙이랄까 법칙은 원래 이렇게 되어 있었다.


국제화 시대 어쩌고저쩌고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국과 돈거래를 하는 것도 아닌, 우리나라 사람끼리 보고 읽을 문서에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거나 단위: 천 원따위로 표시하는 문서가 너무 많다. 공공기관에서 나오는 문서가 유독 심하다. (공무원 오래 하신 분들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더라만.) 외국과 문서를 주고받을 때만 세 자리마다 점을 찍어 주면 된다. 그것도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한글맞춤법(44)에서는 숫자 적기(띄어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고 있다. ‘수를 적을 적에는 ()’ 단위로 띄어 쓴다.’ (보기: 십이억 삼천사백오십육만 칠천팔백구십팔, 1234567898) 이때 숫자 사이 세 자리에 쉼표는 없다. 실컷 만 단위로 잘 적어 놓고, 123,4567,898이라고 적지 말아야 한다.


<연합뉴스> 기사에서 ‘ 9611, 34288700만원이라고 쓴 것도 따지고 보면 틀렸다. 그냥 ‘9611, 34288700만 원이라고 적으면 아주 깔끔해진다. 군더더기 같은 쉼표를 없애고, ‘단위 다음에는 띄어 쓰면 된다.


3243786789276354와 같이 아무리 긴 숫자도 네 자리마다 띄어 쓰고 자리 이름을 주어 3243786789276354처럼 쓰면 얼마나 읽기 쉬운가. 이를 3,243,786,789,276,354라고 쓰면? 한숨부터 나온다. 별 수 있겠나. 맨 뒤에서부터 일, , , , , 십만이렇게 치고 올라갔다가 심호흡 한번 더 하고 나서 천천히 읽어내려 와야겠지. 온 백성이 이렇게 하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니 너무 아깝다. (2014. 9. 10.)

'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행기 값  (0) 2014.10.21
귀는 맛있을까  (0) 2014.10.17
풍성하고 넉넉한 한가위 되세요?  (0) 2014.09.16
미소라면? 된장라면!  (0) 2014.09.16
우리말 같은 우리말 아닌 ‘썸타다’  (0) 2014.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