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따라 바람이 차다. 바람은 정처 없다. 가을꽃은 지향 없이 춤춘다. 높이 선 굴밤나무는 가지 끝을 심하게 떤다. 갈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노랗고 누렇게 탈색한 단풍잎도 마지막 한 철을 붙들고 있다. 잔디 위를 뒹굴고 있는 낙엽들은 쓸쓸함을 부추긴다. 세상 빛을 닮아가는 잔디들도 내년 봄을 기약하며 할 말을 잊은 눈치다. 햇살은 비스듬히 드러누워 이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한다.
담배에 불을 붙여 상석 틈서리에 꽂았다. 연기는 찰나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냄새도 남기지 않은 채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아주 잠깐 뒤 불은 꺼졌다. 맹렬하던 불씨는 한순간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나고 살고 가는 게 연기와 다를 게 뭐 있을까. 웃고 떠들고 화내고 껴안는 모든 행위들이 나뭇잎과 닮았다 아니할 수 있을까. 뛰고 구르고 바장이는 우리들의 몸짓은 잔디위에 구르는 갈잎과 얼마나 다른가.
꽃은 여전했다. 말간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록 몇 포기 아니고 그나마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꽃은 자기가 꽃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날아오는 나비 한 마리 없고 꿀 따러 오는 벌 한 마리 보이지 않지만, 꽃은 꽃 아닌 그 무엇도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며칠을 더 버틸지, 얼마나 많은 향기를 더 내뿜을지는 알 수 없지만, 꽃은 꽃끼리 연락하고 연대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이것들이라도 몇 송이 없었더라면...
담배는 꺼지고 라이터 가스도 닳아 없어지고, 더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길을 돌렸다. 발길 돌리며 돌아보고 돌아보아도 아무 말이 없다. 바람만 나뭇잎 사이를 지나며 제 소리를 낼 뿐. 억새꽃만 하느작하느작 어서 가거라, 조심히 가거라 손짓해댈 뿐. 잔디들만 낮게 엎드려 우우우 울고 있을 뿐. 그 몸짓들은 바람에 섞이고 햇살에 묻히고 흙 내음에 감염되어 그저 그런 의미로 남아 있을 뿐.
2014. 11. 13.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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