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상상

by 이우기, yiwoogi 2014. 11. 17.

1936년생 아버지 열두 살에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하니 1948년이겠다. 정치적 격변기였고 백성들은 힘든 때였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할머니는 1992년에 돌아가셨다. 44년만의 부부상봉이겠다. 저승에서 만나는 것도 반갑고 감격적이었을까. 할머니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우애 좋게 키웠다. 큰아버지는 일곱 남매를 낳았고 아버지는 네 형제를 낳았다. 할머니 슬하에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열다섯 식구가 되었다. 그들이 다 시집가고 장가들어 또 아들딸 낳았으니 다 합하면 몇이랴. 이 일을 할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겠지.

 

2012년에 아버지 돌아가셨으니 할머니는 20년 만에, 할아버지는 무려 64년 만에 아들을 만나는 것이겠다. 숫자가 중요하랴.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었을까. 그 사무침을 우리 어찌 알겠는가. 그 애틋함을 우리가 알 리 있나. 그 원통하고 절통함을, 알면 또 뭐하겠나. 그러나 과연 정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을까. 꿈에서나 보고 말지, 생각만 하고 말지, 그러지 않았을까. 뭐 좋다고 저승에서 가족을 만날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댔는데, 그 말이 괜히 나왔을까.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앉은 한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았겠나. 그 잘생긴 사내는 나에게는 사촌동생이요, 아버지에게는 조카이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그곳에서는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손자 아니었겠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들보다 먼저 찾아온 손자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보였을까, 뭐라고 말했을까,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호통을 치고, 뺨을 때리면서 돌아가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네 마음대로 찾아오느냐 하지 않았을까. 흐느끼는 손자의 두 뺨을 어루만지기는커녕 주먹으로 쥐어박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렇게 가족이 모였겠다. 노래를 부르랴, 춤을 추랴. , 슬퍼라. 만남이 이렇게도 슬플 수 있나. 수십 년 만의 가족 상봉이 이렇게 눈물겹기만 해도 되는 것인가. 술도 안 넘어갈 비극이 또 어디 있겠나. 생각으로는, 마음으로는, 상상 속에서는, 꿈에서는 그토록 그립고 보고 싶더라도 실제로는 정녕 안 보고 싶고 정말 안 그립고 진짜 안 만나야할 가족이 그렇게 구름 위에 둥둥 떠서 만나다니. 전기 아니고 느낌 아니고 의미도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존재한다는 자기긍정 말고는 증명할 길 없는 그 무엇으로 만난 것 아닌가.

 

백성들이 궁핍할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마누라가 이야기하는 전기와 텔레비전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고, 아들이 이야기하는 서울과 지하철과 비행기에 깜짝 놀라고, 손자가 이야기하는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손사래를 치겠지. 이놈의 손아, 그런 게 어딨어! 할애빌 놀릴래그러고선 껄껄껄 웃으실까. 그러고선 헐헐헐 웃으실까. 그러고선 흑흑흐윽 웃으실까.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왜 그리키나 일찍 돌아가셨는지, 뭐가 급해서 그리키나 일찍 우리 곁을 떠나야 했는지, 어디 용하다는 병원에 가서 진단이나 한번 받아보십시다라며 소매를 끌고 있지나 않을는지... 그러다 다시 웃고 다시 울고...

 

그곳에선 그렇게 울다 웃다 다시 울고 그럴까. 정말 기쁨과 행복에 겨워 웃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날도 있을까. 궁금하지만, 가끔 생각나지만, 가보기 어렵고 물어볼 데 없고, 그래서 늘 상상만 한다. 상상이 깊어져 꿈인 듯하다. 꿈이 잦아 현실 같기만 하다.

 

2014. 11. 17.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손식당  (0) 2014.12.09
멸치  (0) 2014.11.18
쓸쓸함에 대하여  (0) 2014.11.13
흔히 쓰는 말 몇 가지에 대하여  (0) 2014.11.11
나무에게 묻는다  (0) 201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