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다. 국수가 맛있으려면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야 한다. 어머니는 서너 명 먹을 국수를 만들 때도 멸치 쉰 마리 정도를 넣어 육수를 끓였다. 세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보기에 지나치게 많이 넣었다 싶었다. 국수 국물 맛은 깊고 구수하다. 약간 비린 듯한 맛은, 사실 감칠맛이다. 짠맛도 멸치에서 비롯한 것이어서 거부감이 없다. 그리고, 멸치는 버려진다.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 가장 자주,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을 들라 하면, 첫째가 시래깃국이요, 둘째가 멸치볶음이다. 시래깃국의 주인공은 겨우내 말린 무청이다. 아주 간혹 소고기 비계가 느닷없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그런데 국을 먹다 보면, 우리 입맛을 황홀하게 해주던 그 시래깃국 맛은 국물에 있었다. 그 국물은 멸치 다시였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때 그것을 알 리가 있었겠나. 그저 시래깃국은 원래 그런 줄로만 알았지.
그다음 자주 먹던 멸치볶음은 몇 종류로 나뉜다. 대가리와 똥과 꼬리와 등뼈를 없앤 멸치를 고추장에 버무린 볶음이 있고, 약간 매콤한 고추와 함께 볶은 게 있고, 대가리와 똥과 꼬리와 등뼈를 그대로 둔 채로 간장에 볶은 게 있다. 멸치도 여러 종류이니 볶음 종류는 더 다양하다. 맛의 순서를 매길 수 있겠나. 볶아져서 밥상에 올라 그나마 멸치의 형태를 보여주던 그 멸치와, ‘국물’을 위해 장렬히 전사하여 온몸이 형해화(形骸化)하던 멸치는 기실 같은 것이었거나, 다르다 하더라도 삼촌이나 사촌쯤 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도 철들고 한참 뒤에 알았다.
어쩌다 된장찌개를 끓이는 일이 있다. 쌀뜨물에 멸치 먼저 넣고 한소끔 끓인다. 멸치 냄새가 웬만큼 퍼진 뒤 다음 재료들을 넣는다. 잠깐, 그 전에 멸치는 건져낸다. 건져내면서 망설인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걸 어떻게 먹자니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는 것이다. 대가리와 똥과 몸과 꼬리와 등뼈가 그 형태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멸치를 음식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버리려는 동작은 멈칫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날이 많다. 멸치는 갈등이다.
어디에서건 국을 마주하면 국물의 깊이를 재어본다. 재어본다는 말은 좀 시건방진 말이고, 음미해 본다고 할까. 음미해 본다는 말도 좀 건방진 말이다. 아무렇든. 그러다가 멸치의 그 야릇하고 비릿하고 고소한 내음이 나면 저절로 웃음이 나고 즐거워진다. 부지불식간에 30~40년 전 시절로 돌아가게 되기도 한다. 입에서는 “음~”이라고 하거나 “아-”라고 하는 신음이 저절로 뱉어져 나온다. 그 음식이 뭐든 간에, 나는 시골 초가집 마루에 앉아 먹던 시래깃국을 입에 넣고 있게 되던 것이다.
잘나고 멋지고 아주 괜찮은, 그렇게 말한다고 하여 아무 이상할 게 없는 멸치는 제 몸을 녹이고 우려내고서야 존재의 의미를 더 극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국수 한 그릇이나 찌개 한 뚝배기나 심지어 소고깃국에서도 우리는 멸치를 만난다. 말보다 맛으로, 맛보다 추억으로 녹아 있는 멸치에게서, 엉뚱하게도 삶의 철학을 배운다. 볶음 요리로 밥상에 올라 구석진 자리에 모른 체하고 앉아 있으면 젓가락이 몇 번씩은 지나가게 되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겠는데, 형체를 찾아볼 길 없게 되어 버린 국물이지만 나중에라도, 아주 나중에라도 그것이 멸치 국물이었음을 알게 되는 어느 미식가의 엷은 미소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인생을, 그런 철학을 잠시잠깐 배워본다.
2014.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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