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여름을 파랗게 불태우던 나뭇잎들이 겨울을 재촉하는 비를 껴안고 스러져 간다. 한때 푸른 기개를 한껏 자랑하던 느티나무들이 뚝뚝 제 입과 귀와 코를 떨쳐내고 있다. 비는 소리 없이 내리지만 그 흔적은 명징하게 에누리 없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침내 맨얼굴이 되고야 말 나무들은 살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을 속수무책으로 맞이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름켜 속에서는 기어이 오고야 말 내년 봄날 이야기를 속살거리며 모진 나날을 견뎌나가게 되겠지.
땅과 나무와 풀과 돌을 적시는 비를 보면, 서리 맺히고 얼음 어는 겨울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알겠다. 오늘 내린 비는 가을비도 아니고 겨울비도 아닌데, 이쪽 저쪽의 경계에 선 쇠말뚝 같다. 요지부동 이것만으로 가을은 끝이고 겨울이 시작한다는 뜻이렷다. 부지런을 떨 때가 되었다. 겨울나기 채비를 서두를 때가 되었다. 방안에서만 웅크리고 있지 않으려면 방한화도 사야하고 털모자도 꺼내야 한다. 두꺼운 외투도 있어야 하고 장갑도 장만해야겠지. 그렇게 겨울을 준비하고 나면, 그렇게 겨울을 이겨나가다 보면 필경 봄은 오게 되어 있으니.
봄 이야기를 하다간 철없다는 지청구를 듣게 되는 시절이다. 하지만 선풍기를 채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 오는 걸 어떡하랴. 가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였는지 도무지 알 수도 없는데, 봄이 멀다고 한가하게 노닥거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봄은 오는 듯 마는 듯 건듯 불고 가는 바람 같기만 하고, 여름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땀방울 속에서 지글지글 끓어 넘쳐흐르고, 가을은 가는 듯 마는 듯 찰나에 끝나버리는데, 가는 가을을 붙잡고 하소연하고 있을 겨를이 우리에게 있겠던가.
비는 가만히 내리지만 온누리를 골고루 적신다. 봄비는 은혜롭다 해도 나무라지 않겠지만, 그 봄비로 삼라만상이 살아나고 사람 얼굴에도 비로소 꽃이 핀다고 하겠지만, 겨울비는 온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 것 아닌가. 비는 조용히 내리지만, 눈치 빠른 짐승들은 겨울채비를 하지 않던가. 눈치 없어 보이는 나무들도 제 입과 귀와 코를 떨쳐내면서 맨몸으로 정면승부를 준비하지 않던가. 사람이라고 배길 재간이 있나. 겨울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지. 봄을 기다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또 내년 가을을 기다리는 넉넉한 마음으로 씨억스럽게 웃으면서.
찬바람 찬비가 장악한 도심 골목 모퉁이에서 가볍다 못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신세 한탄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단풍 구경 간다 국화 축제 간다 영화 보러 간다 데이트 간다 부산스러운 삶들 속에서 갈 곳 없는 영혼 하나 가만히 하늘 올려다본다. 봄이 오긴 올 건가. 온다면 마중이라도 나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행인에게 묻고 나무에게 묻는다. 스스로 입도 떨궈내고 코도 베어내고 귀도 잘라낸 나무는 말없이 본다. 하나 남은 눈으로, 저 멀리서 쉬지 않고 다가오는 봄을 반가운 빛으로 열심히 쏘아본다. 그리웠다는 말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리.
201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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