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노동은 새벽 5시에 시작됐다. 여름엔 희미하게 동터 올 무렵이지만 겨울엔 한밤중 아닌가. 전날의 고된 농사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밤새 어지럽던 꿈자리도 괘념치 않았다. 쌀을 씻어 잠시 불린 뒤 며칠 전 삶아 놓은 보리쌀을 적당히 섞어 밥을 안쳤다. 덜 마른 솔가지 매캐한 연기가 눈을 아프게 했다. 작은 솥에는 국을 끓였다. 시래깃국을 가장 많이 먹었고 무와 고등어가 함께 들어간 짭조름한 찌개도 간혹 먹었다.
일곱 시쯤 다섯 부자(父子)가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셨다. 도시락을 싸야 했기 때문이다. 도시락 반찬은 그때그때 얼렁뚱땅 만들기도 했고, 전날 밤 미리 만들어 놓기도 했다. 네 아들들 도시락을 다 쌀 즈음 우리들의 식사가 끝났고 어머니는 그제야 남긴 밥과 반찬 그리고 누룽지를 드셨다. 도시락은 마루 끝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각자 자기 도시락을 들고 등교했다. 흔하던 풍로도 없고 언감생심 냉장고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진주로 이사하고 나서는 전기밥솥이 생기고 냉장고도 생겼지만 아침마다 도시락 네댓 개를 싸는 노동은 끝이 없을 듯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두 개씩 싸 다녔다. 큰형이 오후 수업까지 하게 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때가 1974년이고 막내인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1989년이니 줄잡아 15년 동안 도시락에 얽매여 사신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오늘 아이들이 학교로 가고 나면 그 순간부터 다음날 도시락 쌀 걱정이 밀려들곤 했으리라. 남들만큼 맛있는 반찬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고, 맛없다고 남겨오면 밉기도 했을 것이고, 친구들과 밥 먹다가 반찬이 형편없다며 놀림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 깜빡하고 도시락을 갖고 가지 않은 날엔 열일 제쳐놓고 학교까지 갖다 주기도 했다. 도시락을 그만 챙겨도 됐을 즈음 어머니는 얼마나 큰 해방감을 누리셨을까.
요즘도 간혹 말씀하신다. “아이고, 말도 마라. 날마다 무슨 반찬을 해줘야 하는지 참…. 어떤 때는 도시락 반찬을 남겨 오면 많이 미안하고 그랬어. 그래도 별수 있었겠나. 그냥 집에서 먹는 대로 싸주는 거지. 반찬투정 별로 안한 건 고마웠다.” 우리는 배추김치, 무김치는 기본이고 멸치볶음, 마늘장아찌, 마늘종장아찌, 깻잎, 단무지, 검은콩볶음, 고추버무리 따위를 싸 다녔고 어쩌다 달걀부침이 하나씩 밥 위에 얹혀 있기도 했다. 김칫국물이 새어나와 가방 밑바닥이 흥건해진 것은 물론이고 책도 알록달록 물들어 있곤 했다.
우리는, 그때도 지금도 말은 안하지만, 정말 좀 잘사는 집 친구가 싸오는 도시락 반찬을 보면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왜 없었겠는가. 입에 넣으면 바로 녹을 것 같은 불고기나 소시지 같은 반찬을 왜 먹을 줄 몰랐겠는가. 그래도 어머니가 정성들여 싸주시는 도시락을 군소리 없이 들고 다녔고, 그것을 먹으며 우리는 공부를 했고 나이를 먹었고 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이다. 그렇다면 15년 동안 아침마다 눈뜨자마자 도시락을 싸온 어머니의 인생은 무엇일까. 우리들의 도시락은 어머니에게 즐거움이었을까 고역이었을까, 지금은 그날들이 추억일까 악몽일까. 201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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