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재봉틀과 한참 씨름한다. 바늘귀에 실 끼우는 일이 쉽지 않은 듯하다. “이것 한 번 해봐라.” 하며 자리를 비킨다. 눈이 침침하고 손도 가늘게 떨리니 쉬울 리가 있나. 그럼, 나라고 별 수 있나. 실 끝부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 잘 들어가지 않는다. 모자가 머리를 맞대고 한동안 씨름하여 겨우 실을 연결하고 시운전을 해본다. 잘 안 된다. 실이 꽉 끼여 부드럽게 먹여지지 않고 끊어져 버린다.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 어디를 조여야 하는지 모른 채 이리저리 해 보다가 실을 바꾼다. 그랬더니 잘 된다. 두어 달 전 “틀이 고장 났다.”고 했는데 미처 고쳐드리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직접 시장에 들고 가서 고쳐 와서는 이날 시운전해 보는 것이다.
한 40년은 되지 않았을까. 어느 날 우리 집 마루에 커다란 종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건 재봉틀이었다. 그때 재봉틀은 허리 높이의 책상에 설치돼 있고 걸상에 앉아서 돌리는 식이었다. 그러니 상자가 클 수밖에. 시골마을로 재봉틀 팔러 다니는 외판원에게 꼬인 것인지 아예 작정하고 진주 시내에서 사 갖고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우리 집에는 옷감 짜는 베틀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베틀로 짠 옷감을 팔아 재봉틀을 산 것이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게 싸웠다.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언제 어디에 소용될지 기약 없는 재봉틀을 비싼 값으로 사왔다고 화를 낸 것이다.
아무튼 재봉틀은 처음엔 귀염 받지 못하는 업둥이가 되어 집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어머니는 재봉틀로 찢어진 옷을 깁거나 기장 긴 바지를 줄이거나 했고, ‘몸빼’ 같은 건 옷감을 사와서 직접 만들어 입기도 했다. 이불 홑청이나 밥상 덮개 같은 것도 옷감을 끊어와 직접 만들었다. 실력이 좋았는지 이웃들도 간혹 부탁을 해오곤 했다. 그런 기술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재봉틀에 앉아있는 어머니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기억한다.
재봉틀은 진주로 이사 올 때 따라왔다. 진주에서 다섯 번 이사 다닐 때도 꼭 갖고 다녔다. 어머니 재산 목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다가 어디 가서 방바닥에 앉아서 돌릴 수 있도록 앉은뱅이로 고쳐 왔다. 그 전엔 발을 까딱까딱하며 휠을 돌리는 식이었는데 이번엔 전기 모터를 달아 아주 편하게 되었다. 일흔이 넘어서도 필요할 땐 꼭 재봉틀을 꺼내어 일했다. 만일 어머니가 재봉틀로 한 일들을 다른 기술자에게 돈을 주어 시켰더라면 그 돈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요새는 뭐할 때 재봉틀을 쓰는지 여쭈었더니 “옷을 샀는데 안 맞으면 기장도 줄이고 품도 고치고 한다.”고 한다. “그런 건 옷 산 데서 딱 맞게 고쳐서 와야지요?”라고 했더니 “바지 끝단 줄이는 데도 3천 원은 더 든다.”고 한다. “그 돈 아껴 뭐하려고요?” 하니 “할매들 모여 화투 칠 때 시켜 먹는 수제비 한 그릇이 3천 원인데 뭐라 카노?”라며 나무란다.
재봉틀은 잘 닦고 관리하여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오랜 세월 닳고 닳아 영락없는 골동품이다.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보물 중 보물이고, 이런저런 집일을 처리할 때 큰 역할을 하는 최고급, 최첨단 기계이다. 어머니의 재봉틀을 바라보면, 기나긴 세월 우리 가족의 입성을 제대로 가꿔주는 임무를 성실하게 해준 그의 말없는 헌신과 어머니의 사랑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실을 갈아 끼울 때 손놀림을 보고 있자니 처음 재봉틀을 사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실을 연결하던 삼십 대 젊디젊은 어머니의 설레는 감성이 전해져 온다. 2014.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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