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생이별을 할 줄 우리 어찌 알았으리. 나는 아직 너를 버릴 마음이 추호도 없고 너 또한 나의 살결을 잊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데, 어쩌다 이렇게 속절없는 이별 앞에 우리가 마주앉은 것이냐. 아쉽고 아까운 마음 가득하여 머릿속이 휑뎅그렁할 정도다. 너 또한 석별의 정이라도 따숩게 나누고자 이렇게 거실 바닥에 뒹굴며 아양을 떠는 것이냐.
나는 5년 전 내 생일 아침에 너를 만났다. 정확히 5년 전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데, 그건 미안함이다. 너는 작고 앙증맞은 포장 박스 안에 웅크리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를 포장한 박스엔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꼬부랑글자가 크고 작게 알록달록 인쇄돼 있었지.
대학시절부터 도루코나 쉬크 같은 날카로운 칼날에 턱을 맡겨온 나로서는 네가 참 낯설고 어색하였다. 세숫비누로 거품을 내어 입 주변과 얼굴과 턱에 처바른 뒤 슥삭슥삭 깎아내던 내 면도 솜씨가 무색할 만큼 너는 단순하고 아름답고 깔끔하였다. 딱히 어떤 까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나는 몇 달 동안 너를 소 닭 쳐다보듯 했으니 그때 너의 외로움과 고독을 내가 무슨 말로 위로하겠느냐.
결국은 얕고 가늘게 드르릉거리는 너를 오른손 왼손으로 옮겨가며 턱과 관자놀이와 뺨과 인중을 깨끗이 깎아내는 나를 화장실 거울에서 너는 보고야 말았구나. 그것이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할까. 그날로부터 너는 아침마다 내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다정한 연인이었고, 외출이 급할 때 대충이라도 얼굴 맵시를 가다듬어주는 훌륭한 면도사였구나. 그 다정함과 세심함 그리고 알뜰함을 내 어찌 잊겠느냐.
혹여 너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할까 저어하여 목욕탕 갈 때만 쉬크 면도기를 들고 간 것 말고는 나는 너를 오매구지(寤寐求之)하였구나. 배터리가 다하여 오렌지 빛으로 신호를 보내주면 나는 사랑을 가득 담아 하얀 불빛이 꺼질 때까지 충분히 충전해 주었다. 너를 나에게 선물한 아내는, 수염과 피질이 끼여 네가 거친 숨을 몰아쉴 때나 안 좋은 냄새를 조금이라고 풍길라치면 완전히 분해하여 칫솔질과 비누칠로 목욕을 시켜주었다. 나도 몇 번이나 그렇게 해 주었네. 여행 가방 챙길 땐 가장 먼저 너를 깨끗한 새 비닐에 쌌다네. 그렇게 지내온 우리 우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어느새 나이를 먹었다. 너의 아랫도리는 수백 번 반복된 충전과 방전으로 인하여 누렇게 빛바래 버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너의 가슴속도 수십만, 수백만 번의 회전으로 닳고 닳아 전기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전환시키기에 힘이 부치겠지. 서늘해서 더 날카로웠던 너의 날도 이젠 많이 무뎌져서 따뜻한 날카로움으로 바뀌었겠지. 그러니 이제 이별한다 해도 그다지 섭섭해 할 때는 아니긴 하다. 그러는 사이 나도 나이를 제법 먹었구나. 이 엄정한 사실 앞에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겠으니, 누굴 탓하고 누굴 원망하겠느냐. 수원수구(誰怨誰咎)라!
비록 내 곁을 떠나지만 어디로 굴러가고 흘러가든 부디 한때나마 나와 함께 즐거워했던 추억의 한 자락은 고이 간직하여 그동안 우리가 나눠온 사랑과 우정을 품고 있으시게나. 잘 가게, 면도기여. 까칠해진 턱과 뺨을 두 손으로 비벼보며 너의 온기와 날카로움을 내가 그리워한다. 201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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