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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걱정

by 이우기, yiwoogi 2014. 9. 16.

지금 사는 국제아파트는 지은 지 30년쯤 된 것 같다. 이사 온 건 2004년이다. 11년째 살고 있다. 아내는 지지난해부터 다른 데로 이사 가자고 했다. 나는 이 집 팔아도 웬만한 아파트 전세도 못 얻는다.”며 반대했다. 집의 절반은 국민은행 소유니까. 그러자 이번엔 집안 분위기를 바꾸자며 도배와 장판을 갈자고 했다. “그럼 집 안 모든 물건을 완전히 들어내야 하는데, 그건 이사하는 것과 비슷하고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라는 이유로 역시 아내의 요구를 묵살했다.

아내는 좀더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 했다. 나는 23평도 세 가족이 살기엔 좁지 않다고 했다. 구석구석 어지럽게 널린 것들을 좀 정리하며 살자고 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청소만 해도 좋으니 새 집, 넓은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내 경제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파트 앞에 법원이 들어오면 집값도 좀 오르지 않겠느냐, 그래도 우리 아파트는 조용하지 않느냐 하는 온갖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갖다 대며 아내의 자그마한, 그러나 마음속에 커다랗게 들어앉은 소망을 지그시 눌렀다. 그런 나의 마음은 항상 편치 않았다. 로또를 사는 이유도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아내는 몇 주 전부터 종이에다 그림을 그리고 어디에다 연락을 부지런히 하더니 방 세 개만이라도 도배와 장판을 갈겠다고 선언했다. 의논이나 협상이 아니라 선언이다. 그것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페인트를 주문하더니 방 몰딩(천장과 벽의 경계 부분)을 흰색으로 직접 칠했다. “몰딩만 새로 해도 천장이 높아진 것 같지 않아?”라고 말할 때 아내의 표정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동화 속 공주가 된 듯 부풀어 오르는 아내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그동안 그녀의 꿈을 애써 억눌러 온 것이 매우 부끄러워졌다.

어제는 하루 종일 방문 3개와 화장실 문, 이렇게 문 네 개를 흰색으로 칠했다. 나는 이런 데 문외한인데 아내는 페인트를 칠하기 전에 젯소라는 것을 먼저 두 번 칠해야 한다는 것, 그러고 나서 페인트를 두 번 칠해야 색이 제대로 먹는다는 것까지 설명해 가며 하루 종일 부산을 떨었다. 나는 마침 일이 있어서 오후 430분쯤 들어와 일을 조금 거들었다. 거꾸로 된 우리 집에서는, 아내는 페인트 통 들고 왔다 갔다 하며 마치 화가가 위대한 유화 작품을 그리듯이 페인트칠을 했고 나는 밀린 설거지하기, 저녁 밥 안치기, 찌개 끓이기, 밥상 차리기, 간식 챙기기 같은 일을 했다.

저녁 930분쯤 대충 끝낸 뒤 맥주를 사 왔다. 하루 종일 고생한 아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우선은 그것밖에 없었다. “방문이 하야니, 넓어진 것 같지 않아? , 좋아.”라고 말할 때 아내의 표정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했다. “내일 또 고생해야 하니, 일찍 자고 8시에 일어나면 돼요!”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잠들었다.

내일, 그러니까 일요일인 오늘은, 월요일 하게 될 방 세 개의 도배, 장판 교체 작업을 위하여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밖으로 들어내야 한다. 장롱 속 이불과 옷가지들을 비롯하여 11년 동안 차곡차곡 쟁여 넣어 놓은 긴 세월엄청난 무게가 거실과 베란다로 나와야 한다. 8시에 일어나라고 했지만 나는 630분에 잠이 깨어 이렇게 걱정만 하고 있다. 아내는 걱정 마세요. 내가 시키는 대로, 순서대로만 하면 돼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정말 걱정이 태산이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걱정이다. 201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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