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좋아한다. 아들도 좋아한다. 나를 닮아서일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먹는 것 같다. 장보러 가면 한두 묶음씩은 사 온다.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찌개라면에서부터 육개장을 넘어 짜장라면까지 골고루 먹는다. 맛있으니까. 집에서 라면 끓이는 당번은 거의 내가 맡는다. 달걀과 파는 기본이고 버섯이나 양파 같은 것도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넣는다. 두부도 얇게 썰어 넣고 묵은지도, 햄도 조금 넣는다. 해놓고 보면 부대찌개 같다. 라면전골이라 불러도 손색없게 된다.
그런데 딱 질색인 라면이 있다. 바로 ‘미소라면’이다. 처음 이 라면을 보고 ‘입가에 떠오르는 잔잔한 웃음’을 생각하고, “거참, 이름 잘 지었네.”라면서 사 먹었다. 그런데 이때 ‘미소’는 내가 생각하는 ‘미소’(微笑)가 아니라 일본말로 ‘된장’(み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된장라면’을 ‘미소라면’이라고 한 것이다. 실제 된장 냄새가 많이 난다. 된장을 넣었으니까. 언젠가 ‘1박 2일’을 보는데, 모닝엔젤(이건 또 뭐야, 아무튼)로 온 여자사람이 아침밥으로 “미소국을 끓여줄게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나 버렸다.
‘미소라면’이 요즘도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이 미소라면을 오뚜기에서 만든다고 한다. 나는 좀 실망했다. 오뚜기에서 만드는 라면을 요즘 들어 특히 더 많이 사 먹는 편이다. 왜냐 하면 오뚜기는 다른 기업에 견주어 노동자들에게 참 잘해 주고 있고, 사회에 도움 되는 좋은 일도 많이 하는 덕분이다. 일부러 ‘스낵면’, ‘진라면’ 같은 것을 챙겨 먹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미소라면이라 이름 붙인 라면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니. 이런 점에 대하여서는 적잖이 실망했다.
생각을 조금 더 밀고 가 본다.
마늘이 몸에 좋은 건 애나 어른이나 다 안다. 고기 먹을 때 마늘 구워 먹는 사람이 많고, 회 먹을 때도 마늘과 풋고추는 꼭 먹는다. 흑마늘을 즙으로 내어 먹는 사람도 많다. 빵집에서 파는 빵 가운데 ‘갈릭빵’이라는 게 있다. 영어가 짧은 나는 ‘갈릭’이 뭔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마늘’이란다. 마늘이 영어로 갈릭(garlic)이다. 그냥 마늘빵이라고 하면 안 될까. 마늘 먹으면 몸에서 입에서 마늘 냄새가 역겹게 나고, 갈릭 먹으면 향기로운 냄새가 날 것 같은가. 갈릭피자, 갈릭치킨……. 이게 뭐야? 얼이 얼어 죽은 사람이 참 많다. 정신을 어디 저당잡혀 놓고 사는 사람이 참 많은 세상이다.
기왕 이야기하는 김에 생각을 더 넓게 펼쳐 본다.
양파는 얼마나 몸에 좋은 채소인가. 나는 라면 끓일 때도 넣어 먹고 달걀구이 할 때도 잘게 썰어 넣는다. 웬만한 찌개나 국 끓일 때 양파는 빠지지 않는다. 물론 중화요리를 먹을 때도 생양파를 잘 먹는다. 맛있고 몸에 좋다. 우리 집에 언제나 없어서는 안 되는 채소는 양파, 감자, 대파이다. 그런데 양파를 ‘어니언’이라고들 많이 부른다. 양파 넣은 피자를 ‘어니언피자’라고 하고 양파 맛 나는 고리모양 과자를 ‘어니언링’이라고들 한다. ‘양파링’이라는 과자도 있긴 있다. 그냥 양파라고 하면 촌스러운가, 냄새가 역겨운가. 어니언이라고 하면 세련돼 보이고 서구식으로 보이는가. 어니언버거, 어니언파닭, 어니언치킨……. 이게 뭔가? 한심하다.
이렇게 찾아보면 한도 끝도 없다.
하늘 빛깔과 같은 연한 파란색을 ‘소라색’이라고 한다. 나는 시골 개울에서 잡던 고둥을 ‘소라’라고 부르며 자랐다. 그래서 그 고둥 색깔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늘’을 가리키는 일본말이 ‘소라’란다. 우리말 파란색이나 하늘색을 무시하고 일본말을 가져와서 ‘소라색’이라고 하니, 정말 제 정신 있는 사람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있는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소라색’이라는 말이 그대로 실려 있다. 마치 우리말이기라도 하듯이. 그러니까 소라색이 이제 우리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졌다.
사람들은 일본 된장은 미소라 하고 우리나라 된장은 그냥 된장이라 한다. 빛깔과 맛이 조금 다르긴 하겠지. 그래서 구분하여 부르고 싶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이름을 그렇게 붙이면 나중에 어찌 되겠는가. 외국에서 온 것은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게 우리나라에 있는데도 죄다 외국말을 써야 하나? 이게 말이 되나? 일본 메밀국수는 ‘소바’라고 하고, 우리나라 메밀국수는 그냥 메밀국수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세상이니, 내 입만 아프다. 나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
주머니가 있었다. 옛적 우리네 조상들이 허리춤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언젠가 바지에 주머니가 달려 있는 옷이 들어왔다. 아마 조선시대 때 청나라에서 들어왔겠지. 그러니 그건 호(胡)주머니다. 청나라 말을 그대로 갖고 오지 않고, 주머니에다 당시 청나라(호족)를 가리키던 ‘호’만 붙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주머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나 슬기로운가.
담배가 있었다. 지금도 있다. 원래는 담바고였다고 한다. 아마 서양말 토바코에서 왔을 것이다. 아무튼 담배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 속에서 살아왔다. 심심초, 상사초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도 있었다는데 담배라는 말을 이겨낼 수 없었나 보다. 이제 그 누구도 담배를 우리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서양 담배를 수입해서 피우게 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재배하여 가공하여 만들어 피우던 것은 ‘담배’라고 하고 서양에서 들여온 것을 ‘토바코’(tobacco)라고 불렀으면 어찌 됐을까. 하지만 담배를 즐겨 피우던 많은 애연가들은, 그리고 담배인삼공사 같은 관청과 언론에서도 하나같이 ‘양담배’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담배는 담배인데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게 되었다. 찾아보면 이와 비슷한 보기는 많다. (조선)낫과 왜낫, (조선)간장과 왜간장…. 일본 된장을 ‘왜된장’이라 하지 않고 미소라고 하는 건 얼빠진 짓이 아니고 무엇일까. 나는 탄식한다.
2014. 8. 31.
2017. 3. 7.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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