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라는 말이 있다.
차(茶)와 말[馬]이 아니다.
주로 부정문이나 반어 의문문에 많이 쓰이는데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감히’라는 말이다.
‘아무리 해도’라는 뜻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차마 말 못할 일을 많이도 겪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도 보게 되고
차마 외면하지 못할 일과 마주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차마’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세상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어린 학생들이 물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
한 달 훨씬 넘게 바닷가를 지키고 있는 가족들을
우리가 차마 고개 들고 마주할 수 있겠는가.
무능한 윗사람들 때문에 어린 제자들이 죽었다고
항의하는 선생님들을 차마 벌줄 수 있을까.
온갖 제도와 인간과 자본이 얽히고설킨 난마 속에서
차마 제 정신 갖고 살아갈 엄두가 나겠는가.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인(仁)의 단서라고 했다.
아이가 물에 빠지려 할 때 다급히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아이의 부모로부터 보상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측은지심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이가 빠져 죽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의 단서인 측은지심이 곧 ‘차마 하는’ 마음 아닐 것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인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에 산다.
인이 부족한 사람이 시스템을 움직이는 그런 나라에 산다.
이 슬픔과 분노와 억울함을 차마 참을 수 있을 것인가.
2014.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