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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라디오, 무한 상상력의 보물 창고

by 이우기, yiwoogi 2013. 9. 17.

라디오는 듣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노래를 들으면 가수 얼굴을 떠올리고, 토론을 들으면 마주보며 점잖게 이야기하는 논객들을 떠올린다.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면 상상력은 몇 배로 늘어난다.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 영화에서 본 고구려 기마병들을 떠올리거나 칭기즈칸의 후예를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낸다. 잘 아는 진행자의 얼굴을 생각하며, 이미 고인이 된 가수의 젊을 적 모습을 생각하며 듣는 라디오는, 그래서 즐겁다. 청취자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재미있다. 시골 사는 아주머니가 보낸 사연을 들을 때는 어릴 적 고향마을을 생각하며 꿈속에 잠기는 것 같고, 어느 작은 회사 경리 아가씨가 보낸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 아가씨의 얼굴과 그이가 앉아 있는 사무실 정경과 그이와 헤어진 어떤 남자의 얼굴까지 떠올려 본다. 그게 즐겁다. 소리만 들려주는 라디오에서 다양하고 푸짐한 영상을 떠올리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기조차 하다. 어떤 때는 사람 이름만 듣고도 그의 얼굴 생김이나 성격까지 유추해 보기도 했으니.

나는 고등학생 시절 방송국에 엽서를 보낸 적이 여러 번 있다. 비틀즈의 노래를 신청하기 위해, 어떤 퀴즈의 정답을 보내 상품을 타 보기 위해 없는 실력을 총동원하여 글씨를 예쁘게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알록달록 색깔을 넣은 엽서를 보내기도 해봤다. 한 번은 한국인이 애창하는 팝송 10곡을 적어 보냈다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탄 적도 있다. 내가 보낸 엽서가 채택되어 DJ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황홀했다. 당시 MBC는 예쁜 엽서전을 해마다 열기도 했다. 1년 동안 애청자들이 보내온 엽서들을 모아 전시했는데, 그 엽서들은 라디오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화였고 예술이었으며 기적이었다. 엽서를 보내는 이들의 상상은 머나먼 우주를 날고 있었다. 그 엽서를 보는 사람은 또 새로운 상상의 날개를 펴게 된다. 참 재미있는 추억이다.

요즘 라디오 청취자는 거의 엽서를 쓰지 않는다. 방송국 인터넷 홈페이지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글을 올린다. 자기 이름을 밝히고 올린 재미있거나 가슴 따뜻한 어떤 사연을 듣고, 자기 의견을 말하고 싶으면 휴대 전화로 언제 어디서든 짧은 글, 긴 글을 날려 보낸다. 그러면 라디오 진행자는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 번호 끝번호만 들먹이며 “1234님이 보내주신 사연입니다.”라며 소개를 해 준다. 1234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적은지 많은지, 서울 사는지 진주 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알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그가 어떤 사무실에 앉아 있는지 기차간에 앉아 있는지 해변에 서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발동하지 않는다. 귓속으로 내용이 흘러들어오긴 하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순간은 하얗거나 까맣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조용필 노래가 나오면, 그 노래를 신청한 사람은 어디 사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지만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전화번호 끝 네 자리밖에 없다. 그런 상황은 즐겁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다. 다만 씁쓸할 뿐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가던 시대는 서서히 옛 추억이 되어 간다. 여전히 DJ는 노래를 소개하고 있고,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가 있으며, 별이 빛나는 밤은 아직 반짝이고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서서히 익명의 그림자가 침입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연의 주인공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 수 있듯이, 그에 의견을 보태는 사람도 어디에 사는 누군지 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선물을 받게 되는 주인공은 또 누군지 알려주면 어떨까. 어디에 사는 아무개라 한들 정말 그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주소와 이름만으로도 상상은 무한대로 퍼져나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나는 오늘도 출퇴근길에 라디오를 듣는다. 집에서도 스마트폰으로 라디오 앱을 통하여 이런저런 방송을 듣는다. 어떤 방송은 팟캐스트로 듣는다. 속삭이듯 귀를 자극하는 음성, 음향은 더 크고 강하게 뇌를 자극한다. 상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라디오는 상상력의 보물 창고이다. 경남도민신문 2013.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