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회사, 카드사, 은행 같은 데서 전화가 자주 온다. 간혹 홈쇼핑 회사나 건강식품 판매 회사에서도 전화가 온다. 자동차 종합보험 만기일이 다가오면 하루에 예닐곱 통의 전화를 받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온다. 회의 중이거나 운전 중이거나 식사 중이거나 아무튼 나의 상황을 배려하지 않는다. 어떤 땐 윗사람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있는데 이런 전화가 와 당혹스러워진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이런 전화를 친절하게 받는 편이다. 여유가 있을 때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고, 아주 가끔 그들이 권하는 그 무엇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여유가 없을 때는 지금 바쁘니 나중에 전화해 달라고 한다. 주변에서 스팸성 전화를 왜 그리 친절하게 받느냐고 의아해하는 일도 이따금 있다. 어떤 때는 아예 받지 않을 때도 있긴 하다.
아내가 어느 보험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 10년도 더 된 일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를 갖게 됐다. 그만둘까 하다가 그래도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한 것 같다. 보험회사 일의 대부분은 전화로 시작하여 전화로 끝나는 것 같았다. ‘텔레마케터’라는 말을 나는 그때 제대로 알았다. 퇴근하는 아내는 거의 매일 맥이 빠진다고 했다. 하루 종일 전화통 붙들고 씨름하느라 힘이 빠지기도 했겠지만,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불친절하고 짜증나는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곤욕이었을 것이다. 막말을 하는 ‘고객’을 하루에 한 명쯤은 만나게 되니까. 결국 임신 말기쯤 일을 그만두었지만, 나에게는 기억에 오래 남을 인생의 쌉싸름한 장면이다. 그 후로 나는 걸려오는 텔레마케터의 전화를 냉정하게 끊거나 박절하게 대하거나 짜증스럽게 대꾸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리가 몇 퍼센트에서 몇 퍼센트로 올랐느니 이러저러한 곳에 가면 몇 퍼센트 할인 혜택이 있다느니 다른 회사에 비해 어떤 이점이 있다느니 하는 텔레마케터의 목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와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건강식품이 몸에 얼마나 좋은지를 전화로만 설명 듣고 이해하기란, 적어도 나에겐 거의 불가능이다. 가령 자동차 보험회사 보험료의 경우 보험사마다 견적서를 하나하나 출력하여 나란히 펼쳐놓고 대조하고서도 어떤 게 나은지 판단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전화에 울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소음으로 여겨질 뿐이다. 말은 또 얼마나 빠른가. “좋은 정보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저는 크게 관심이 없으니 이 시간에 다른 분에게 전화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점잖게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끊고 나서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새겨들으면 유익한 정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전화로 설명을 듣고 잘 이해하는데 나는 그게 왜 잘 안되지?’ 이런 생각도 한다.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거꾸로 내가 필요하여 보험회사, 카드사, 은행으로 전화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어김없이 자동응답기가 “개인고객은 1번, 법인은 2번”이라고 한다. 주민번호 13자리를 입력하라고 한다. 그러고서도 또 무엇에 대한 것은 1번, 어떤 것에 대한 것은 2번, 무엇 무엇은 3번… 이런다. 잘못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눌러야 한다. 그래도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에 접근하지 못한 경우, 마지막에 가서 상담원과 연결하려면 0번을 누르라고 한다. 0번을 누르면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라고 한다. 기다리거나 전화를 끊었다가 나중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서너 번 하고 나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문득, 짜증이 난다. 서글퍼진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 왠지 속는다는 기분도 든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텔레마케터로부터 전화가 오면 오늘도 최대한 친절하게 받고 기분 좋게 전화를 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필요할 때도 기분 좋게 걸고 유쾌하게 끊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생각하며. 경남도민신문 201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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