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생 때부터 집안의 크고 작은 경조사가 있을 적마다 ‘봉투’ 받는 일을 도맡아 했다. 큰형이 결혼할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외사촌동생 결혼 때도 나는 언제나 한 구석에서 봉투 받는 일을 해야 했다.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결혼식장에서 신랑측, 신부측 축의금 받는 이가 결혼식 끝난 뒤 나란히 사무실로 가서 예식장비 등속을 결제해야 했다.
예식장 축의금 절도 사건이 심심찮게 보도되곤 하던 때여서 자리를 비울 수 없는데다 결혼식장에 늦게 나타나는 하객도 더러 있기 때문에 가족사진 촬영도 못할 때가 있었다. 어른들은 그 귀찮은 일을 굳이 나에게 시킨 이유에 대해 “봉투에 한자로 이름을 써오면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말했던 것 같다.
사실 그랬다. 부조금을 받노라면 봉투에 씐 이름이나 축하글은 각양각색이었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은 아예 이름과 주소를 인쇄한 봉투에 ‘祝 華婚’ 또는 ‘賻儀’라고 도장을 찍은 봉투를 내밀었다. 일반 회사원으로 보이는 분들은 볼펜이나 사인펜으로 이름을 깔끔하게 적어온다. 수줍음 많은 아가씨들은 앞쪽에는 ‘축하합니다’라고 쓰고 뒤쪽에 조그맣게 자기 이름을 적어온다.
그런데 어떤 점잖은 중년신사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자를 휘갈겨 쓴 봉투를 던져주고 가신다. 이름을 알아볼 수 없으니 방명록에 기록할 수가 없다. 옆에 지켜선 형님께 물어보기도 하지만 난감한 상황은 거의 매번 일어난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한자를 더 잘 알 만한 친척이 그 일을 맡아야 하고, 나는 싫은 내색도 못하고 호출되곤 했던 것이다.
나는 한자를 휘갈겨 쓰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난 이런 사람이다.’라고 으스대는 심리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가방끈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좀 길고, 그것도 한자를 이렇게 일필휘지로 쓸 수 있을 정도의 내공도 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내보이고 싶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 이름을 읽어내기 위해 고생 좀 해봐라.’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한자를 또박또박 정자로 쓸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아름다운 추억이 된 일도 많다. 시장에서 배추 장사를 하던 어머니의 친구분들이 갖고 온 봉투는 내 마음속에 푸른 배추처럼 싱싱하게, 잘 익은 배추김치처럼 달콤하게 남아 있다. 아주머니들은 숫제 자기 이름도 없다. 봉투도 새 봉투가 아니다. 어디서 한두 번 썼음 직한 구깃구깃한 봉투에다 연필로 ‘17번 아지메’라고 써온다. 17번은 농협 경매 때 쓰이는 자신의 고유번호이리라. 간혹 ‘김또순’ 이런 이름도 있고 ‘은주 엄마’, ‘도라지 아줌마’ 이렇게 써오는 분도 있었다. 거친 손에 쥐어진 하얀 봉투를 받으면 순간 목이 멘다. 거기에는 ‘이름 없이’ 살아온 평범하고 질박한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삶의 신산스러움과 억척스러움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봉투가 구겨진 것만큼이나 구김살이 많았을 그분들의 인생을 작은 봉투를 통해 투영해 보곤 했다.
나는 부조금을 낼 때 봉투에 내 이름과 축하 또는 위로 인사말을 되도록이면 깔끔하게 정자로 쓰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어떤 연유로 봉투에 내 이름과 주소는 인쇄를 했지만, 그래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거나 ‘행복한 결혼을 축하드립니다.’라는 인사말은 최대한 정성들여 우리말로 풀어 쓴다. 글씨가 조금 비뚤어지거나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쓴다. 혹시 봉투를 받는 사람이, 나중에 나를 참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경남도민신문 201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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