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홈쇼핑 옷 광고를 보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옷 빛깔을 가리키는 말에서부터 나는 할 말을 잊는다. 오렌지색, 카키색, 네이비색, 와인색…. 마치 외계인들이 지구 행성의 대한민국을 점령한 것만 같다. 그런데도 옷은 잘 팔리는 모양이다. 어떤 색은 매진이 됐고 주문을 위해 접속 중인 고객이 몇 백 명이라고 난리다. 간혹 화장품 광고를 보면 그래도 옷 광고는 낫다 싶다.
대학 교육까지 정상적으로 마쳤다고 생각하는 나는 간혹 이티(ET)인 내가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라면을 제법 자주 먹는 편인 나는 ‘미소라면’ 광고를 보고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싶어 가게에 사러 갔다가 뒤로 자빠질 뻔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그 라면을 집어든 순간 그 미소가 웃음이라는 뜻의 미소가 아니라 ‘된장’이라는 뜻의 일본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된장라면’이라고 하면 촌스럽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주윗분이 뜨개질을 하면서 “소라색 실이 참 예쁘네.”라고 하기에 시골 개울에서 잡던 소라를 떠올리면서 “소라 고둥의 색깔이 어떻게 예쁘게 나왔어요?” 물었다. 그러나 그건 연한 하늘색 실이었다. 그게 어째서 소라색이냐고 했더니 ‘소라’가 ‘하늘’이라는 뜻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소라색과 하늘색은 조금 다른 것이라고도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다. 열쇠라는 말은 놔두고 ‘키’라고 한다. 30년 전쯤에는 자동차 열쇠만 유독 ‘키’라고 한 것 같다. “너희들은 집 열쇠, 서랍 열쇠만 갖고 있지만 우리는 ‘자동차 키’를 하나 더 갖고 있다.”며 으스대는 듯했다. 그러더니 요즘은 거의 모든 열쇠는 키에 점령당한 것 같다. ‘열쇳말’은 오히려 어색하고 ‘키워드’가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과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보수적인 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을 살려 써야 한다, 되도록이면 맞춤법에 맞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적지 않다. 한 신문사가 몇 해 전 마구잡이로 쓰이는 국적 불명의 용어를 쉽고 편한 우리말로 바꿔 쓰자는 운동을 한 적이 있다. 꽤 오랫동안 많은 낱말을 우리말로 바꾼 것 같은데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웰빙’을 ‘참살이’로 바꾼 것뿐이다. 한동안 신문, 방송에서 ‘참살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다. 생명을 얻는 것으로 보였다. 언중이 거리낌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참살이라는 말의 운명은 그다지 탄탄대로가 아니었던가 보다. 다시 웰빙이 득세하고 있다. 요즘은 ‘힐링’이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치유’라는 말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1980~90년대 대학생들은 ‘신입생’, ‘프레시맨’이라는 말 대신 ‘새내기’라는 말을 널리 쓰기 시작했다. ‘MT’ 대신 ‘모꼬지’라는 말도 유행이 되었다. 새내기는 신입생이라는 말과 함께 아직 쓰이고 있지만, 모꼬지라는 말의 목숨은 그리 길지 못했다.
우리는 스스로 문화민족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 경제적으로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었고 무역규모 1조 달러로 세계 8위에 올랐으며 해외 원조 규모 17위라는 위상을 자랑한다.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이바지한 사람이나 단체에 주는 상의 이름이 ‘세종대왕상’이라는 데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갖는다. 인도의 한 부족이 한글을 자기들의 문자로 쓰기로 했다고 또 난리다.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크게 보도된다. 그렇지만 정말 우리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아끼고 다듬고 있는가. 돌아보면 부끄럽고 앞으로 가자니 아득하기만 하다. 한글날이 23년 만에 다시 공휴일로 된 올해는 좀 달라질까. 나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경남도민신문 201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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