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일이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감자 한 상자를 사 왔다. 네 아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려고 15kg짜리 상자를 이고 온 것이다. 종이상자는 옆이 터져나갈 정도였다. 우리는 큰 기대를 가지고 노끈을 끊고 테이프를 뜯어 상자를 마당에 부렸다. 제법 주먹만 한 감자가 쏟아져 나올 줄 알았던 우리는 “애걔걔!”를 합창했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큰 놈들이 상자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누굴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먹고 살아야 하는 게 농민인데.”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속박이로 애먼 사람을 골리다니.’ 상자에는 무슨 농협이라는 상표가 인쇄돼 있었고, 생산자 이름까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 농협 홈페이지에 억울한 사연을 올렸다. 다음날 농협 ‘경제상무’라는 분이 전화를 했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는 그 경제상무의 목소리에 진정성이 느껴져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는 농협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기 위해 입력한 우리 집 주소로 새로운 감자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것은 나도 바라지 않고 우리 어머니도 바라는 바가 절대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말렸으나 며칠 뒤 우리 집에는 정말 알토란같은 감자 한 상자가 배달돼 왔다. 그러는 사이 감자를 그렇게 포장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의 처지도 이해하게 됐고, 경제상무의 민원 대응도 마음에 들었다. 그 일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해먹겠다는데 별 수 있나.”라고 쉽게 이해하고 쉽게 포기하는 착한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해 먹는 지배자, 정치인들이 참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민도가 높아진 근현대에 와서도 그렇다. 신문고도 있었고 난리도 몇 번 일어났으며 인터넷도 있지만, 혹세무민하며 착한 백성을 힘들게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선택을 잘 못했다고 느낀 사람은 외려 자신을 탓했고 ‘정치’와 ‘선거’라는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 사회관계의 거미줄에서 스스로를 일부러 소외시키기도 했다.
나는 감자를 먹을 때면 그때 그 일을 생각한다. 그것이 몇 만 원 하는 감자 한 상자였기에 그런 정도로 하고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것이 월급쟁이들의 세금을 낮추는 문제였거나 대학 등록금과 관련 있었거나 우리 군인을 외국에 파견하는 심각한 문제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국회의원 선거는 감자 한 상자를 사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생각을, 그래서 하게 된다. 경남일보 2012.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