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55분에 스마트폰 알람이 울린다. 손을 더듬어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을 서너 곳 돌려가며 주요 뉴스를 본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 문 앞에 놓인 조간신문을 집어 든다. 거실에 주저앉아 또는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아 주요기사를 훑어본다. 어떤 기사는 꼼꼼히 읽어본다. 다시 스마트폰을 켜 하루일정과 이메일을 확인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챙긴다. 페이스북에 올려진 글들도 대강 확인한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급히 문자를 보낼 일도 생긴다. 축하인사 아니면 부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경우다.
출근한다. 차 안에서도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듣는다. 말랑말랑한 FM방송은 사치라 생각한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비밀번호를 두 번 입력해야 한다. 내부통신망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누른다. 혹시 놓친 문서는 없는지, 동료들의 경조사는 없는지 살핀다. 사무실에서 보는 신문도 빠른 속도로 넘긴다. 커피를 한잔 마시지만 그것을 여유라고 할 수는 없다. 머릿속에서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두 번 세 번 정리하고 있으니까. 전화가 걸려온다. 용건이 급한 것이라면 머릿속에 정리하던 하루 일은 순식간에 뒤섞이고 만다. 일의 경중과 선후는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닌 것 같다.
퇴근시각이 다가온다. 하루 종일 받은 전화 메모가 낙서처럼 어지럽다.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못 했는지, 무엇을 안 했는지 모를 지경이다. 시간이 되었으니 퇴근할 뿐이다. 퇴근은 사무실을 벗어나는 것을 말할 뿐 집에 도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를 이야기하고 한국사, 세계사를 논하며 여당, 야당을 싸잡아 욕하다 보면 혀는 꼬부라지고 탁자에는 소주병이 줄지어 서 있다. 마지막까지 의식을 붙들고 있어야 대리운전 기사에게 집 위치를 말해줄 수 있다. 대리운전비 잔돈을 챙긴 날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이라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주민번호, 아파트 현관문 비밀번호, 가족들의 전화번호, 스마트폰 비밀번호, 컴퓨터 아이디와 비밀번호, 포털사이트 아이디와 비밀번호, 대리운전 전화번호, 또 인터넷 서점 아이디와 비밀번호….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몰라도 숫자들은 꼭 기억해야 한다. 살아가기 위해.
그래도 삶은 즐겁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난 뒤 돌아보면 많은 일을 했고, 그중 잘한 일도 많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도 있고 포기해야 마땅한 일도 있다. 하나하나 따져 고민하고 후회하고 갈등하면 안 된다. 그럴 겨를이 없다. 잊을 건 잊고 챙길 건 챙겨 내일을 준비한다. 몸도 마음도. 경남일보 2012.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