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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및병

by 이우기, yiwoogi 2012. 3. 30.

글 쓰는 게 직업인 나는 고민이 있다. 작다면 작지만 크다면 큰 고민이다. 바로 때문이다. 내 눈에는 이 글자가 도무지 우리 글자로 안 보인다. 읽기도 어렵다. 나는 을 되도록 안 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잘 안 된다. 내가 직접 쓰는 글에는 안 쓰면 그만이지만, 다른 사람의 자료를 인용하여 글을 쓸 때 을 그대로 두자니 눈에 거슬리고 하나하나 고치자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쓴 사람은 나름대로 쓴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고민이다. 고민이 깊어 병이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은 아주 풍년이다. ‘특정환자, 알러지체질 및 질환치료 중이신 분’, ‘대학, 대학원 및 특수대학원’, ‘무슨무슨 법률시행령 제조 및 동법 시행규칙 제’, ‘빈방 및 외출 시 소등처럼 쓴다. 교과서에도, 잡지에도, 신문 기사에도, 법조문에도 넘쳐난다. 보기를 들자면 끝이 없다. ‘(), 그리고, 또는의 뜻으로 쓴다. 그냥 쉼표나 가운뎃점으로 갈음해도 좋을 듯한데 굳이 이다.

이 내 눈에 우리 글자로 안 보이는 것은, 그냥 말을 할 때는 거의 쓰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써놓은 글을 보고 읽을 때에만 쓰는 것 같다. 회의할 때, 술 마실 때, 밥상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할 때는 을 쓰지 않는다. “특정환자 하고 알러지체질 하고 또 질환치료 중인 사람이렇게 말한다. “대학, 대학원, 그리고 특수대학원이렇게도 말한다. ‘이 없으면 오히려 말하기 쉽고 읽기 쉽다. 당연히 이해하기도 쉽다.

나는 및병()’에 걸려 꽤 오랫동안 고생을 하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글과 말 사이에 끼어들었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한자 미칠급()’에서 왔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미치다에서 이 왔다는 것이다. 이 한문 문장에서 의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에서도 으로 쓰고 의 뜻으로 읽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한문이나 일본글에서만 써야지 우리말과 글에 마구잡이로 섞어 써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떻게 고쳐 쓸 것인지도 많이 연구하고 실습했다. 이만큼 이야기하고 나면 나의 및병은 조금은 나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엄연한 우리말이고 우리글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따위와 조금 다른 뜻이라고 생각하며 쓴다. 글 쓸 때나 써놓은 글을 읽을 때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무엇보다, 국어사전에도 버젓이 올라 있다. 할 수 없이 나의 및병은 좀더 오래 갈 것 같다경남일보 201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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