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마음이라고만 말하기엔 너무나 많은 떨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떨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날부터 술을 삼가고 목욕재계하고 옷 갈아입고…. 부산을 떨었더랬습니다. 아, 물론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분도 계셨으리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8590계가 한창 잘 나갈 때, 혹은 그 이후 누구 결혼식이나 喪당했을 때 한두 번 본 것 외에는 무려 얼마만이던가요. 꼭 세어보진 못했지만 20세기에 뵙고 21세기 들어서는 대략 처음이 아니었던가요.
모인 사람은 이상곤 김정순 이우기 방성철 이병욱 이일강 성선희 강명선 김동창 방성철의 가족 강명선의 가족 하여 어른 11, 어린이 2, 아기 1명이 모였네요. 이번 모임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최대 20명까지 모일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그에 비하면 좀 줄어든 숫자지요. 장재경이 갑작스런 집안의 喪事로 못 오게 되고, 백은숙이 갑작스런 막내(아이가 셋이랍니다)의 高熱로 못 오게 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하상효는 김해서 출발해 오다가 차가 하도 막혀서 함안 산인고개에서 차를 돌렸다고 합니다. 그런 악조건을 뚫고 모인 사람이 이 정도이면 1세기 만의 모임치고는 성공한 셈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각 학번을 대표하는 사람 1명씩 정도는 대체로 모인 셈이네요. 85 이상곤, 86 이우기, 87 김정순, 89 방성철, 90 이병욱, 91 이일강, 92 성선희 강명선, 94 김동창…. 88이 없고 93이 없는 게 조금은 아쉽죠, 뭐.
집안일을 부랴사랴 마치고 좀 늦게 도착한 이상곤 김정순 부부, 가족끼리 부곡 하와이에서 “끼얏호~!”하면서 놀다가 쌩얼로 나타난 강명선 부부, 일찌감치 진주에 잠입하여 진주엠비씨네에서 영화 한 프로 땡기고 여유있게 나타난 성선희 김동창 부부, 술도 잘 못하면서 그래도 한잔 해볼 거라고 버스를 타고 온 이병욱, 집사람을 상봉서동 처갓집에 모셔놓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이일강 모두모두 반가웠습니다. 특히 편집실 공주(공포의 주둥아리)의 원조랄 수 있는 방성철과 가족(중 1녀는 서울로 방학 휴가 가고 못 옴)들은 가장 반가운 사람이었죠.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만한 날이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온다던 재학생들은 한 명도 오지 못했답니다. 현재 남은 식구는 모두 4명, 그것도 1, 2학년 뿐이라는데 학교에 있는 저한테조차 연락이 없으니….그렇습니다. ㅠㅠ
안부를 묻고 소줏잔을 건네고 탑처럼 쌓아올린 감자탕 속 통뼈의 높이를 무너뜨리면서, 씨래기를 건져 찢어 먹어면서 우리의 우정은 깊어갔습니다. 소주는 물을 탄 듯했고 고기는 부드러웠으며 에어컨 바람은 무척 시원했습니다. 시간이 가는 건지, 술잔이 흐르는 건지, 웃음이 넘치는 건지 알 수 없는 밤이었습니다. 자리를 옮기며 술잔을 건넸고 동창이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습니다.(참고로 식당에서 찍은 사진 중 건질 만한 것은 카메라를 바닥에 두고 자동으로 찍은 것밖에 없습니다. 김동창의 출렁이는 배 때문에 카메라가 자기도 모르게 많이 떨었던가 봅니다.)
방성철 집으로 갔죠. 안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꼭 가자 하여, 그러면 가보자 하고 갔지요. 양주와 맥주가 나왔고 수박이 나왔고…. 또 뭐가 나왔는데 다 기억을 못하겠군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날 제가 마셨을 소줏잔이 도대체 몇 잔이나 될지요. 어찌나 인기가 좋던지요. 방성철 집으로 꽃바구니를 배달시킨 김동창의 센스에도 박수를 보내고, 그 술취한 다수의 난폭한 손님들을 말없이 맞이하여 준 김영미 씨(방성철의 부인)께도 감사드립니다. 물론 바쁜 일 많은 일 제쳐두고 멀리서 가까이서 달려온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려야겠지만요.
회비를 거두었습니다. 우리의 임시 총무가 총액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대략 50만 원은 넘는 것 같네요. 부부가 참석한 분들께는 1만 원을 깎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은 ‘방성철 새출발 축하금’(결혼 축의금이라고 해도 될 것 같고, 새집(비록 전세지만 월매나 좋은 집인지) 입주 축하금이라고 해도 될)으로 드렸습니다. 그래놓고선 그날 저녁 안주값과 술값은 방성철네가 냈답니다. 이리저리 아주 스무스하게 잘 해결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날 참석하려다가 갑작스런 일로 오지 못한 장재경도 회비는 내었답니다. 얼마나 예쁘고 착한 마음씨이며 울매나 개척자스런 발상이던지요.
이렇게 우리들의 1세기만의 모임은 끝났답니다. 다음날. 김양수가 일본 출장 갔가 왔다면서 모임 잘했는지 궁금하여 전화를 했지요. 서울 있으면 오기 쉽지 않을 터인데 마음은 늘 함께하는 것 아니겠는지요. 말에 따르면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진주로 귀향할지 모르겠습니다. 백은숙도 참석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다음날 전화가 왔었습니다. 온 가족이 목포에 있는 남동생 집으로 놀러갔다가 왔는데 막내(이 녀석이 몇 개월짜린지 잘 모르겠습니다만)가 열이 많이 나는 바람에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백은주도 있었는데 이 친군 몇 학번이더라? 이 편지 받는 사람 중 아는 사람이 기별하여 주길 바랍니다. 월요일이 되니 경상대 총무과에 근무하는 김복정이 찾아와 행사 잘 했느냐 묻고 가네요. 다들 몸은 제 몸이 아니라도 마음은 늘 개척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전에 방성철이 전화를 했는데, “뭐 실수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고 어쩌고 저쩌고 우물 쭈물” 그래서 일단 상곤 선배집에 전화하여 형수님 안부나 여쭈라고 해 줬습니다. 참석한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람? 하는 궁금증을 가질 것입니다. 궁금하게 해 놓고 안 가르쳐주는 게 이우기의 특기!
사진은 일단 첨부파일로 2장을 보내드립니다. 식당에서 밥묵고 노는 장면 하나와 방성철 집에서 기념촬영 한 것입니다. 다른 사진은 대부분 쓸모없이 흔들려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하여 모조리 버릴 예정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 건질 만한 것은 제 블로그에 올려 둘 터이니 심심풀이 땅콩 먹듯 들러 하나라도 건지시길 바랍니다. 블로그 주소는 저의 이메일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방성철 집에서 마치고 저는 대리운전하여 왔고 마산 방면으로 가는 후배님들은 어디서 차 한 잔을 더 하고 갔다 그러고 방성철은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까지 술이 깨지 않아 힘들었다고 그러네요. 개인 개인의 안부도 제법 주워들었는데 다 까먹었습니다. 누구 집 아이는 몇 학년이고 누구는 어디서 무엇 해서 먹고 사는지 재미있는 사연들일랑 모두 잊어먹어 버렸으니 누굴 탓하겠습니까. 제가 다시 보내드리는 우리 식구들 연락처를 보고 궁금한 사람끼리 서로서로 안부 주고받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름만 덩그러니 있고 연락처가 없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저에게 기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압니까?
아참, 그리고 가장 궁금해 할 것 한 가지. 그럼 다음 모임은 언제 또 하남요? 아하, 모릅니다. 말씀을 종합하면 가을 찬바람 불 때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모임을 하는 게 어떠냐? 하니 그게 좋겠다고들 답하여 그리 결정된 듯하지만 그러면 누가 준비하고 연락하나? 하니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려서 결론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총대를 메고 내가 한번 우리 개척자 동지회를 부활시켜보겠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없이 손 들고 나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더러 하라구요? 에이 설마, 저도 바쁜 사람인데 말이에요…. 그럼 모두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2008. 8. 4. (월)
진주에서 이우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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