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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긴 하루

by 이우기, yiwoogi 2024. 10. 6.

긴 하루

 

하루가 길다. 지겹다거나 지루하다는 뜻은 아니다. 7시 30분 사무실 나가서 몇 가지 일을 했다. 굳이 종류를 세자면 6가지가 넘는다. 그렇게 휴일 아침을 서두르는 건 까닭이 있다. 2시에 시작하는 마당극을 보러 가기 위해서이다.

 

10시 조금 지나 집으로 왔다. 아침에 하지 못한 설거지부터 해치웠다. 컵라면을 끓이고 식은밥을 데워 끼니를 때웠다. 11시 10분쯤 길을 나섰다. 동의보감촌으로 향하는 길이다. 주차하는 게 가장 힘들고 귀찮은데 용케 금방 차를 세웠다. 운이 좋다.

 

 

무릉교 입구에 있는 <청이네>로 곧장 올라갔다. 주차장에서 한걸음에 올라가기엔 제법 멀고 높다. 운동이라 여기면 된다. 허벅지와 장딴지와 발목으로 전달되는 허리의 통증이 나쁘지 않다. 꼬마기차를 타고 오르는 사람, 나처럼 계단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짧은 숨을 내쉰다. 삼삼오오 알록달록 참 좋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날씨 알림에서는 전국에 비가 온다고 했다. 제주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이 동네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쏟아질지 알 수 없다. 제발 3시, 아니지, 5시까지만 버텨 달라고 속으로 빈다. <청이네>에서 다방커피를 한 잔 사 마신다. 구수하다.

 

 

내려가는 길은 서두를 게 없다. 혼자니까. 시간도 넉넉하니까. 느릿느릿 걷는다. 꽃도 보고 시도 보고 경치도 보고 사람도 보면서 걷는다. 나만의 시간이다. 이번 제24회 한방약초축제 기간에 네 번째 동의보감촌을 방문했는데 처음으로 제대로 여유를 즐긴다.

 

2시가 다 되어 간다. 공연장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맨 뒤 한가운데 의자를 찜했다. 공연은 미처 2시가 되기 전에 시작했다. 하늘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은 야속했다. 5시는커녕 2시부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객석에 쳐 놓은 천막 지붕이 제법 시끄럽다. 약초축제 행사 중앙무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보다 더 크다.

 

 

배우들은 흔들림이 없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흔들림 없다는 건 익히 안다. 객석에선 몇몇 관객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다른 관객이 채웠다. 극이 진행될수록 집중도도 높아졌다. 웃음과 손뼉이 때맞춰 나왔다. 배우가 박수를 유도할 땐 어김없이 반응이 화끈했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공연을 끝까지 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맨 뒤에서 열심히 환호하고 손뼉 쳤다.

 

 

하지만 45분쯤 진행됐을 때, 나는 한 배우가 자기가 나올 대목이 아닌데도 나오는 걸 보고야 말았다. ‘아!’라는 탄식이 저절로 터졌다. 배우가 자기가 등장할 때가 아닌데 무대로 나온다는 것은, 비로 인하여 공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기 위함이라는 걸 나는 눈치로 안다. 내 눈치는 틀리지 않았다.

 

빗줄기는 조금 가늘어지긴 했지만, 그래서 조금 무리한다면 끝까지 달려가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사정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소품들이 비에 젖는다는 점이었다. <목화>에는 실제 목화 솜으로 만든 소품이 아주 많다. 이 솜이 젖어버리면 말리기가 쉽지 않다. 10월 9일에도 하동에서 공연해야 한다. 소품이 망가지면 다시 만들 겨를도 없다. 배우들 옷이 젖고, 흠뻑 젖은 바닥에 주저앉고 뒹구는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소품이 모조리 젖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일 수밖에 없다.

 

 

모든 배우가 나와서 공연을 정상으로 진행했으면 맨 마지막 대목에서 부를 주제곡을 불렀다. 문익점 선생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간단히 설명도 해준다. 물론 그 설명도 원래 내용에 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공연을 마쳤다. 오늘 공연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 15분가량은 반전에 반전이 아주 재미있는데, 아쉽다.

 

 

비는 야속하게도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갖고 가지 않은 탓에 비를 맞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늘까지 220회 정도 마당극을 관람했는데 이렇게 날씨 때문에 중간에 그친 경우는 처음인 듯하다. 한번쯤 있었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 소품이 날아갈 뻔한 적도 있고, 비가 오락가락한 날도 있었지만 중간에 중단한 경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마당극 <목화>는 10월 12일(토)과 13일(일), 11월 2일(토)과 3일(일) 아직 네 번이나 남았으므로 괜찮다.

 

 

빗방울이 차의 앞 유리를 때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유리창 닦이가 왔다 갔다 하기 전에 얼룩져 내리는 무늬도 좋아한다. 차의 지붕에 떨어져 부딪는 우주의 함성도 즐겨 듣는다. 자동차 바퀴가 물기를 머금고 포도 위를 달리는 소리는 정말 정겹다. 산청에서 진주로 돌아오는 국도 3호선은 넉넉함과 여유로움으로 천천히 흘렀다. 많은 자동차가 저들끼리 대화하면서 달린다.

 

 

집에 와서는 주방에서 한 시간 동안 요리를 했다. 요리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반찬 3가지를 만들었다. 이웃사촌이 농사지어 나눠준 가지와 박을 나물로 만들었다.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된장찌개도 한 뚝배기 끓였다. 박과 가지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식재료 가운데 하나다. 두부, 감자, 양파, 호박 따위 채소류를 좋아한다. 이렇게 해 먹어도 맛있고 저렇게 해 먹어도 맛나다. 된장찌개엔 돼지도 넣고 참게도 넣었다. 향기도 좋고 맛도 좋다. 그럼 됐지.

 

 

하루가 길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밥 챙겨 먹고 일하러 나갔다가 산청을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인 <응답하라 20세기>에서 들려주는 1980~90년대 노래를 흥얼거렸다. 시간은 어느새 두어 시간이 퍼뜩 지나가 버렸다.

 

이제 저녁상 차려 새로 만든 반찬 안주 삼아 중국술 두어 잔 마시면 오늘도 끝이다. 중국술을 식혀 줄 얼음덩이도 장만해 놓았다.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는 참 좋다. 월요일이 다가오는 소리는 좋지는 않다. 32년째 나아지지 않고 좋아지지 않는 월요병이다. 고질병이다. 어쩌랴. 걱정한다고 나아지지 않고 고민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또 다른 월요일을 제정신으로 맞이해 보자.

 

 

점심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마당극 보면서 손뼉과 고함을 너무 크게 내어서 그런지, 반찬을 세 가지나 만들어서 그런지, 아무튼 배가 고파졌다. 다행이다. 사무실에서 마당극 보러 출발할 땐 저녁에 집에서 할 일을 남겨 놓았는데, 아서라 말아라, 이제 됐다.

 

2024. 10. 6.(일)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