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돌이>
비가 내린다고 했다. 전국에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그러고 나면 날씨가 추워진다고 했다. 가을은 이다지도 짧단 말인가. 전국 곳곳에서, 아니 경남 곳곳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즐길 겨를도 없이 말이다. 개천절 휴일을 앞둔 수요일 오후에 극단 큰들 쪽에 카톡으로 물었다. “내일 오작교가 어찌 될랑가요?” 곧 대답이 돌아왔다. “합니다. 비 맞고라도….” “네.”라고 답했다.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오지 마세요. 추워요.”라는 문자가 왔지만 내 눈에는 “따뜻하게 입고 오세요.”로 읽혔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창밖부터 살폈다.
아침 9시를 넘은 시간에 나는 거실에 앉아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카톡이 왔다. “오늘 산청 공연은 1시로 옮겨서 공연하기로 했어요.” “앗,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고 페이스북으로 가보니 큰들은 공연시간 변경을 안내해 놓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12시쯤 출발하려던 것을 1시간 앞당겨 11시쯤 아내와 산청으로 달렸다. 운 좋게 주차도 쉽게 했다. 동의보감촌에 자리한 맛집 ‘산청각’에서 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렇게 하여 극단 큰들의 명작 마당극 <오작교 아리랑> 329회째 공연을 관람했다. <오작교 아리랑>은 8월 3일(토) 오후 2시 하동군 최참판댁에서 보았고, 추석 연휴 첫날이던 9월 14일(토) 오후 2시 하동군 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축제장에서 보았다. 그날도, 이날도 무척 더웠다.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공연하던 배우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 날이다. 온몸이 땀에 절었던 날이다. 배우도 관객도. 그러고서 <오작교 아리랑>을 개천절인 오늘 다시 보게 되었다.
하늘은 우중충했으나 금방 비를 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을 1시간 앞당긴 건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몰라서였다. 결과적으로, 공연 끝나고 축제장을 한 바퀴 대충 돌아본 뒤 집으로 출발할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청읍을 벗어날 즈음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그렇지만 원지 근처에서부터는 비가 보이지 않았다. 공연 시간을 앞당긴 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잘 아는 사람은 잘 알 텐데, <오작교 아리랑>은 아랫마을 남돌이와 윗마을 꽃분이의 결혼 소동을 다룬 마당극이다. 배우 가운데 꽃분이는 정해져 있다. 남돌이는 배역이 없다. 관객 가운데 한 명을 즉석에서 섭외하여 남돌이 역할을 맡기는 게 이 작품의 최고 특징이자 장점이자 매력이다. <오작교 아리랑> 329회째 공연하는 동안 329명의 남돌이가 탄생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이야기한다.
남돌이와 꽃분이의 결혼식장이 마련되고 주례(사회)를 맡은 배우가 하객들을 향하여 신랑측과 신부측을 헷갈리지 말고 잘 앉으라고 안내한다. 그러고선 맨 앞줄에 앉은 한 남자 관객에게 “축의금은 내셨어요?”라고 묻는다. 남자 관객이 안 냈다고 하자 “신랑하고 별로 안 친한가 보네요. 축의금 내시고 식사도 꼭 하고 가세요. 이 예식장 밥맛이 아주 좋다.”라고 한다. 관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신랑, 신부가 맞절할 시간이다. 그런데 남돌이가 없다. 관객 중 남자 관객 한 명을 남돌이로 즉석에서 섭외할 차례다. 이를 잘 모르는 관객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이를 너무나 잘 아는 나 같은 사람은 과연 어떤 이가 남돌이가 될지 궁금하여 고개를 쭉 내밀곤 한다. 남돌이 친구역을 맡은 배우 한 명이 “남돌이 어디 있노?”라고 하자 다른 남돌이 친구가 “남돌이 저기 있네~!”라며 객석으로 걸어간다. 관객들은 객석 어디에 배우가 숨어 있는 줄 알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맨 앞줄에 앉아 아직 축의금을 내지 않았다던 관객은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촬영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관중을 쓰러뜨려 버린 결정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남돌이 친구가 “남돌이 저기 있네.”라며 지목하고 다가간 사람은 바로 축의금을 아직 내지 않은 그 관객이었다. 나는 정말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우스웠다. 만약 주례가 “축의금은 내었는지?” 물었을 때 “냈다.”라고 했더라면, 그는 자기 결혼식에 축의금을 낸 역사상 전무후무한 웃기는 신랑이 될 뻔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너무나 웃겨서 마당극이 끝나는 시간까지 자꾸 생각나고 또 생각나서 참을 수 없었다. 잠시 마당에 불려나가 신랑 역할을 마친 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그 관객을 나는 자꾸 바라보았다. 그 옆에 앉은,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분도 눈에 들어왔다. 대충 살펴보니 그 뒤에는 그들의 부모도 앉은 듯했다. 다들 우습고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덕분에 정말 많이 웃었다.
이분은 남돌이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 연기’를 했다. 배우가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안내하지 않아도 제 할 말을 하는가 하면, 꽃분이와 춤추는 장면에서도 전혀 어색해 하지 않으며 그 순간을 즐기는 듯했다. 덕분에 약간 서늘한 바람을 쐬며 마당극을 관람하던 모든 관객이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오작교 아리랑>을 보면 남돌이 덕분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갑자기 연출되곤 하는데, 이날도 바로 그런 날이다. 어떤 때엔 남돌이를 맡은 사람이 중간에 귀가해 버린 적도 있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아챈 어린이 관객이 “남돌이 갔어요!”라고 외치며 안타까워했다. 앞서 말한 하동 북천 공연 때엔 남돌이로 지목된 남자분이 곧 자리를 떠야 한다며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남돌이 섭외에 조금 애를 먹었다. 결국은 행사 사회를 보던 분이 남돌이가 되었다. 물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오작교 아리랑>은 극단 큰들의 대표 마당극이다. 전국에서, 일본에서 등등 329번씩이나 공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관객이 마당극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1등이다. 남돌이 편과 꽃분이 편으로 나뉘어 버나 이어 달리기를 할 땐 모든 관객이 어린 시절 가을운동회 마당으로 돌아간 기분을 만끽한다. 남돌이 부모와 꽃분이 부모가 손을 잡을까 말까 할 땐 한목소리로 “잡아라.” 또는 “악수해!”라고 외친다. 중간중간 감칠맛 나는 대사와 몸짓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앞으로 500회, 1000회를 이어나가기를 빈다.
올해 10월 첫 주는 퐁당퐁당 휴일이 많아서 좋다고들 한다. 지나고 보니 퐁당퐁당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일하는 날은 다음날이 쉬는 날이라 마음이 설레어서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안 좋고, 쉬는 날은 바로 다음날이 출근하는 날이라 마음 놓고 어딜 가거나 한잔할 수가 없어 안 좋다. 이럴 거면 차라리 퐁퐁퐁 당당당 이렇게 일하고 놀면 좋겠다. 그래도 나에겐 마당극이 있으니 그것이 퐁당퐁당이든 퐁퐁퐁 당당당이든 참을 수 있다. 내일 금요일 하루 일하고 나면 토요일, 일요일 다시 마당극을 보러 갈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낼 수 있다. 생활의 활력소, 삶의 에너지, 즐거움과 기쁨의 한마당, 마당극장은 나에게 행복의 전당이다.
2024. 10. 3.(목)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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