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비, 길, 꽃, 연>
큰들문화예술센터가 마련한 ‘2024년 큰들마당극마을 공연축제’가 끝났다. 7월 11일 까망극장 개관식, 12일과 13일 공연축제를 잇따라 진행했다. 35명 큰들 단원은 물론, 강원도 원주에서 달려온 자칭 ‘원주큰들’ 분들과 진주·창원 큰들풍물단, 젊은 도우미들이 고생 많이 하셨다. 배우들은 전체 행사를 진행하는 스태프이자 배우로서 한 사람이 서너 가지 역할을 했다. 정말 모두 수고 많이 하셨다. 사흘 동안 진행한 축제를 사건사고 없이, 불미스러운 일 없이 무사히 잘 마친 것을 후원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내년에는 더 멋지고 훌륭하게 잘해 달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해냈다. 고맙다.
사흘 모두 행사장을 찾아간 한 사람으로서 몇 가지 느낌을 적어놓고 싶다. 아는 분은 다 알겠지만, 이 글은 거의 일방적으로 큰들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 미리 고려해 주시길 바란다.
손
이번 사흘 축제에서 내가 가장 유심히 본 것은 손이다. 먼저 떠오르는 손은 기타를 치는 김동욱 씨의 손과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김정경 씨의 손이다. 김동욱 씨의 손은 사람의 손이라고 부를 수 없다. 여섯 가닥 기타 줄 위에서 자유자재로 춤추는 그의 손은 신의 손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머리에서 떠오른 가락이 손가락으로 전달되어 어느 기타 줄을 붙들고 어느 줄을 튕길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의 손가락에는 뇌가 달려 있다. 손가락 끝에 달려 있는 뇌에서 어떤 가락을 생각하자마자 0.001초도 되지 않아 기타 줄을 튕기는 것이다. 덕분에 한여름 늦은 저녁에 기타 선율을 타고 잘 놀았다.
김정경 씨의 손도 그에 못지않다. 아코디언을 연주할 때 김정경 씨의 손가락은 왕거미 다리 같다. 건반 위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기어다니면서 오묘하고 신기한 소리를 자아낸다. 소나기처럼 굵고 바쁘게 지나가는가 하면 단옷날 그네 뛰는 춘향의 치마처럼 하염없이 퍼질 때도 있다. 손등엔 팽팽한 긴장이 불끈불끈 솟아나지만 악기 소리는 느슨하고 멈칫하며 그러다 한번씩 휘감아 돈다. 연주하는 그 손만 바라봐도 열 시간, 백 시간도 즐거울 수 있다.
<찔레꽃>에서 젊은 귀래를 맡은 윤민서 씨의 손도 본다. 손은 몸의 일부이니 모든 연기에서 당연히 중요하다. 1시간 동안 진행되는 마당극 중에서 젊은 귀래가 처음으로 생선 장사를 배우는 장면이 유독 눈에 띈다. 아이 다섯을 두고 남편은 영원히 바다로 떠났다. 바닷가에 살면서도 평생 생선 만질 줄 몰랐다. 시장 상인들이 장사를 가르친다. 죽은 생선의 비늘을 치고 배를 딴다. 산 생선의 목에 칼을 꽂는다. 그런 과정을 배울 때 윤민서 씨의 손은, 바들바들 떨린다. 명치끝의 떨림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어떡하든 장사를 배워야 다섯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이성적 집념과 본능적 부끄러움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내면적 갈등이 손가락의 동작으로 드러난다. <찔레꽃> 잎사귀 같이 푸른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놓았다, 손가락을 꼬았다 풀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이의 손 연기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손을 눈여겨본 관객은 얼마나 될까. 윤민서 씨의 연기는 물이 올랐다. 내면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실력이 장난 아니다.
1인극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에서는 끝부분에 손가락 하나가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 뉴힌은 25분가량 신세타령을 한다. 아내가 무서운 뉴힌은 아내의 구둣발 소리만 들려도 등골이 오싹한 모양이다. 대중강연장에서 아내 흉을 실컷 보면서 나름대로 해방의 쾌감을 느낀 뉴힌은, 무대 밖에서 무대 쪽으로 들어온 손 하나에 끌려나간다. 아내는 검지손가락 하나를 까딱까딱하면서 남편이자 이 1인극의 주인공을 끌고 나간다. 공연 내내 큰소리치던 남자의 기개를 손가락 하나로 제압하는 그이의 손을 본다. 세상일이란 때로는 이러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러쿵저러쿵 미주알고주알 흉을 보다가도 서류 한 장에 달려가야 하고 손끝 하나에 오른쪽 왼쪽으로 뛰어야 하는 평범한 직장인들을 보는 것 같다.
플루트를 연주하는 황정인 씨의 손과 설장구를 공연하는 박종환 씨의 손도 본다. 황정인 씨의 손은 느리고 박종환 씨의 손은 빠르다. 플루트의 손은 우아하고 장구의 손은 경쾌하다. 플루트의 오른손 왼손은 역할이 단조롭다. 장구의 오른손은 수직형이고 왼손은 수평형이다. 수직형은 우직하게 장구의 한 면만 두들기지만 수평형은 좌우 양면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다. 손이 만들어내는 음률과 가락은 천상을 날다가 지상으로 낙하하기도 하고 숲속을 거닐다가 얼음바닥으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순식간의 일이다.
비
축제 사흘 동안 큰들 단원들의 마음속 한구석엔 똑같은 근심 걱정이 있었을 것이다. 비. 때는 장마철 아닌가. ‘실내’ 공연장을 지어 완성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여서, 비로 인해 공연이 어찌되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비는 행사 전반을 지배하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아닌가.
첫날 개관식 때는 하늘이 도왔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덕분에 행사장을 찾아오는 사람, 중간에 돌아다니는 사람, 나중에 돌아가는 사람 모두 편안하고 안전했다. 뒤풀이가 끝나갈 즈음 비가 조금 내렸다. 마치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잔치의 흥을 조금 가라앉히라는 계시처럼 비가 내렸다. 마을에는 비가 왔지만, 진주로 돌아오는 길은 뽀송뽀송했다. 마을에만 은혜처럼 비가 내렸다고 생각한다. 하늘도 까망극장 개관을 축하한 것이라고 본다.
둘째 날은 비를 머금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는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구름 덕분에 마을은 시원했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넘어가는 놀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첫날과 달리 둘째 날은 마을 안 여기저기서 릴레이식으로 공연하는 덕분에 관객들이 몇 군데 공연장을 옮겨 다녀야 했고, 어떤 공연은 야외에서 진행했기에 비가 온다면 낭패스러울 뻔했다. 비는 오지 않았고 모든 일정이 아주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셋째 날은 조금 달랐다. 둘째 날에 비해 구름의 무게가 한두 근은 더 나가 보였다. 결국 비 때문에 청춘버스킹을 식당으로 긴급히 옮겨 진행했다. 뒤이어 진행할 예정이던 풍물 퍼레이드는 취소했다. 미리 옷을 갈아입고 준비하던 큰들 단원들과 진주·창원 큰들풍물단 등 여러 사람이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다. 물안실카페에서 열릴 예정이던 플루트와 아코디언 공연은 까망극장 실내로 옮겼다. 그런 과정을 의논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큰들의 대표와 간부진의 판단은 옳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별다른 물의 없이 행사는 잘 끝났지만, 비는 이런 행사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변수이다. 그래도 까망극장 덕분에 잘 끝났다.
길
진주에서 마당극마을까지 달려가는 데 40분이면 충분하다. 잘 닦여진 국도를 달리다가 병정리에서 우회전하여 고불고불한 들길을 5분 정도 올라가면 마을이 나온다. 진주에서 마을까지 가는 길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사흘 축제 기간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경상도에서 찾아간 관객이 가장 많았다. 전라도, 충청도, 서울·경기에서 온 관객도 있었다. 그들은 얼마나 먼 길을, 어떻게 달려왔을까. 그 길 위에서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들이 먼 거리를 달려오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강원도 원주에서 온 분도 있다. 그들은 자칭 ‘원주큰들’이라고 한단다. 너덧 명이 불원천리 달려와 사흘 내내 축제를 도왔다. 도우면서 그들도 즐겼을 것이다. 진주와 원주를 이어준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그들은 내년에도 그 다음해에도 달려올까. 그때 그 길은 올해의 길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그들을 대가도 없이 이유도 없이 달려오도록 한 큰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일본에서도 손님이 왔다. 일본 로온 회원들이 길을 나섰다. 그들은 한 해에 두세 번은 큰들 마당극마을을 찾아온다. 큰들 단원들도 이러저러한 일로 일본으로 간다. 내년 3월엔 일본에서 다섯 차례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이어진 길은 어떤 길일까. 앞으로는 또 어떤 길이 펼쳐질까. 궁금하다.
마당극마을 안길도 본다. 꽃길이다. 눈 돌리는 곳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꽃이다. 계절에 맞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이름을 다 욀 수는 없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마을 안길을 천천히 걸으며 꽃을 사진에, 마음에 담는다. 그러는 사이 2019년 10월부터 5년여 세월 동안 큰들이 걸어온 길을 상상해 보거나 생각해 보거나 추억해 보지 않을까. 길은 항상 열려 있다. 길은 항상 그곳에 있다. 큰들이 늘 열려 있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꽃
마을에 피어난 꽃만 말하면 끝인가. 아니다. 축제를 함께하기 위해 마당극마을에 도착하면 큰들 단원들이 꽃같이 환한 얼굴로 맞이한다. 자동차 주차를 안내하는 이진관 씨가 웃는다. 그 옆에서 정태국 씨도 경광봉을 들고 웃는다. 참가자를 확인하고 팔목띠를 매어주는 윤정순 씨도 웃는다. 정용철 씨는 ‘풍물 퍼레이드가 잘돼야 할 텐데’라는 걱정을 하면서도 웃는다. 박정현 씨는 빨강 셔츠를 입고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웃는다. 꽃이다.
물안실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쿠키를 파는 류연람 씨와 김가람 씨가 웃는다. 고개를 숙이며 소리 없이 씨익 웃는다. 꽃이 피었다. 까망극장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서지은 씨는 조금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웃는다. 무로하라 쿠미 씨도 미소 짓는다. 최명희 씨는 관객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한다. 스마트폰으로 공연 장면을 찍으며 웃는 이는 임경희 씨다. 첫날 사회를 볼 땐 목소리에 꽃향기가 묻어났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무대의 조명과 음향을 책임진 김세림 씨 표정도 충분히 상상된다.
손님들에게 밥을 파는 이은숙 씨, 김영란 씨, 박진묵 씨, 오진우 씨는 식당에 핀 꽃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비빔밥 나물은 꽃밭이다. 소고기국밥에 담긴 고사리와 콩나물과 무도 꽃을 피운다. 비빔밥과 소고기국밥은 향기롭다. 막걸리 잔에는 꽃처럼 아름다운 이들의 얼굴이 비친다.
20대 청춘들은 <신난당>을 작당하여 스스로 꽃이 되었다. 조익준 씨, 홍수완 씨, 박정현 씨, 윤민서 씨, 손리현 씨가 만들어 낸 공연은 바람에 흔들리며 춤추는 꽃이고 머지않아 열매를 맺을 꿈에 부푼 꽃이다. 힘과 패기와 상상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꽃이다. 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꽃 아니던가.
앞치마를 두른 화가 박춘우 씨는 무엇을 하다가 나와 마주친 것일까. 어린이들의 낚시터를 지키는 이정우 씨는 갓 피어난 꽃과 어울려 스스로도 어린 꽃이 되었을까. 풍물 퍼레이드를 함께하기 위해 이틀 연속 마을을 찾아온 진주·창원 큰들풍물단원들도 모두 맑고 밝아서 눈부신 꽃이 되었다. 항상 큰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기도 하고 발 빠른 길나장이가 되기도 하는 이들은 참 예쁘다.
<찔레꽃> 공연을 마치고 까망극장을 빠져나왔다. 조금 전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줄지어 서서 인사한다. 송병갑, 김혜란, 김안순, 하은희, 이인근, 안정호, 김정경, 홍수완, 윤민서 씨가 가을길 코스모스처럼 환하게 웃는다. 산청에서 동의보감촌 가는 길가에 피어난 구절초처럼 웃는다. 박춘우 씨 그림 속에 노랗게 하얗게 발갛게 피어나는 따뜻한 꽃들처럼 포근하게 웃는다. 자랑스럽게 웃는다. <아내와 나 사이>를 연기한 최샛별 씨, 홍수완 씨, 김혜란 씨도 웃는다. 1인극을 연기한 김상문 씨, 김안순 씨도 웃는다. 청춘버스킹을 공연한 박정현 씨, 윤민서 씨, 손리현 씨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서울에서 온 친구 아가씨도 하얗게 웃었다.
개관식을 하던 7월 11일 저녁 큰들 모든 단원이 무대로 나와 <한뫼줄기>를 합창했다. 행복한 그들의 화음은 귀로 들으니 노랫소리였고 눈으로 보니 꽃이었다. 한 종류의 꽃이 아니다. 저마다 제 모양과 향기를 지닌 꽃이었다. 널따란 화단에 제가끔 피어나 나비를 부르고 벌을 부르는 꽃이었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넓게 뻗으며, 향기를 높이 올리고 넓게 퍼뜨리는 꽃들이었다. 비 오면 빗물을 머금고 햇살 퍼지면 햇빛을 머금어 달달하고 달콤한 열매를 곧 맺어낼 그들은 꽃이다.
사흘 내내,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준비한 전민규 예술감독과 이규희 대표와 진은주 실장은 스스로 꽃이고, 모든 단원들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밀어주고 끌어주는 큰 꽃이 되었다. 큰들 마당극마을에 가면 언제나 울긋불긋 알록달록 각양각색 만화방초가 피어 있는 까닭을 조금 알겠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꽃은, 아무래도 큰들의 공연축제를 함께 즐기면서 웃고 울며 손뼉 친 관객들이 아닐까 싶다. 전국에서, 해외에서 달려와 큰들이 만들어내는 이 커다란 잔치마당을 마음껏 즐긴 분들이 가장 큰 꽃이다.
연(緣)
인연이란 참 신기하고 거룩하다. 마당극마을을 걷다 보면 아는 사람을 참 많이 만난다. 반갑고 고맙다. 큰들 덕분에 오래전 알던 사람을 새로이 만나고 이름만 알던 사람을 반갑게 만나고 전혀 모르던 사람을 처음으로 인연 맺는다. 마당극마을 각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부부 교수를 만났다. 큰들에겐 큰바위얼굴과 같은 김명철 원장님 부부도 만났다. 대화가 길었고 다시 만날 기약을 했다. 소중한 인연이다.
그리고 한 분 한 분 소개하기도 벅차게 많은 분을 사흘 내내 만났다. 배우들의 가족도 만났다. 비록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였지만 이제 먼 곳에서 보더라도 ‘저분이 누구의 가족이다’라는 걸 알아차리겠다. 처음엔 조금 어색하다가 다음엔 만나면 오랜 지기처럼 손을 잡게 된다. 이인근 씨 가족, 박정현 씨 가족, 윤민서 씨 가족을 이번에 만났다.
큰들 가족들은 어떤 인연으로 저렇게 만나 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있다. 그 답을 끝내 찾지 못하였다. 찾을 수도 없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현재 그들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흐뭇하고 따듯하게 바라볼 뿐이다. 믿음과 기대를 갖고 지켜볼 뿐이다. 현재 큰들 단원끼리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은 여섯 쌍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한 쌍이 더 탄생한다고 한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지고지순한 인연의 아름다움이 늘 고맙다. 그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행복의 향기를 조금씩 맡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2024. 7. 14.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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