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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묵은해와 새해

by 이우기, yiwoogi 2024. 1. 2.

<묵은해와 새해>


1991년 1월 전역할 때부터 1998년 6월 결혼할 때까지 살던 집, 아버지 어머니 뵈러 2020년 10월까지 거의 매주 달려가던 집, 마지막엔 조카가 살다가 결혼으로 떠나간 집, 2023년 11월 어머니 세 번째 제사를 지낸 집, 옥봉동 본가를 팔기로 했다. 큰형님이 집을 정리한다기에 12월 30일 하루 동안 집을 치웠다. 옥상에 올라가 시내를 둘러보았다. 수만 가지 생각과 기억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아버지 어머니의 눈길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고 녹아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추억과 이별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나도 제법 나이를 먹은 것이다. 

 


12월 31일 아내와 목욕탕 다녀오는 길에 엠비씨네로 갔다. <3일간의 휴가>를 보았다. 죽은 어머니가 생전 화해하지 못한 딸을 만나러 3일 휴가를 얻어 지상으로 왔다. 미국에서 교수하던 딸은 김천 어느 농촌 마을에서 백반식당을 운영한다. 큰 갈등도 아니고 큰 감동도 없었지만 2시간 내내 마음이 아팠고 슬펐고 그리고 따뜻했다. 객석 여기저기서 콧물 들이켜는 소리가 영화음악처럼 들렸다. 눈물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두고 울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녁엔 이웃사촌과 치맥을 먹었다. 가족끼리 다 모여 건배하고 웃었으며 덕담을 나누었다.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고 새해의 행복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집에 와서, 이미 술은 취하였으나, 한 잔이 아쉬워 상을 차렸다. 1월 1일 아침에 떡국에 넣어 먹을 굴을 대충 구웠고 냉장고 맨 아래칸에 있던 표고를 구웠다. 먹다 남은 술을 비우며, 아내에게 말했다. 사는 건 쉽지 않고 일은 더 어려워지며 벌이는 늘 이 모양이라 미안하다고 했다. 깊은 연못에 가라앉은 무기력과 무자존감까지 드러내 보여주지는 않았다. 만취하여 꿈도 꾸지 않고 잔 날이다. 연말이니까.

 


1월 1일 하루 종일 책 읽고 텔레비전 보며 보냈다. 바깥 날씨는 입춘 지난 봄날 같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200쪽 <그리스 로마 신화>를 80%쯤 읽었다. 저녁엔 찌개를 끓여 상을 차렸다. 실은, 찌개도 아니고 국도 아니고 찜도 아닌 이상한 그 무엇이다. 작년 김장김치를 푹 익혔다. 냉동실 대패삼겹살을 넉넉히 넣었다. 안주로 훌륭해 보였다. 술은 딱 한 잔씩만 나누었다. 새해니까.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건 사실 엄청난 일이다.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며 정리하고 반성하고 축하하는 일이 먼저다. 새해에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갈래짓는 것도 이때 해야 한다. 추상명사를 보통명사로 만들고 그 말 아래에 딱딱한 실행계획 같은 말을 덧붙여 놓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온 날에 감사하고 살아갈 두려움 앞에 납작 엎드리기로 했다. 그럴 나이가 되었으니까.


2024. 1. 2.
이 우 기 
묵은해 보내고 새해 맞이한 느낌을 짧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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