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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찔레꽃

by 이우기, yiwoogi 2023. 10. 3.

<찔레꽃>

 

바다는 어떻게 생겼는지, 바다가 더 파란지 하늘이 더 파란지 모르는 시골처녀 귀래가 순박한 남자 우재 하나 믿고 바닷가로 시집을 갔다. 작은 고깃배 하나만 있으면 중국도 가도 일본도 가고 이탈리아도 갈 수 있다고 믿는 이 순진한 젊은 귀래와 낭만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직한 우재 사이에 아이가 다섯이나 되었다. 둘은 금슬도 좋고, 다정도 하지. 남자가 여자에게 바친 결혼 선물은 찔레꽃 다발이다.

 

남편은 장모님께 돈을 빌려 새 배를 장만하고서는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바닷가에 살았지만 장사는커녕 고기 손질마저 해 본 적 없던 이 가련한 여인 귀래에겐 천만 다행으로 정다운 이웃사촌이 있다. 젊은 부인에게 고기 손질하는 방법, 손님 부르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고깃배를 가진 남자 이웃은 고기를 싸게 대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한다.

 

하지만 귀래에겐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부끄럽고 민망하다. 죽은 생선조차 무섭다. “오이소, 고기 사이소.”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손가락이 떨리고 입술이 떨리고 심장도 떨린다. 이러다간 올망졸망 자기만을 바라보는 아이 다섯을 굶겨 죽일 판이다. 학교에선 수학여행비 갖고 오너라, 멜로디언 갖고 오너라 주문하는 게 많다. 우윳값도 내어야 하고 참고서도 사야 한다. 신발은 물이 샌다. 아이들은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날마다 돈 달라고 졸라댄다. 눈앞이 아득하다.

 

귀래는 마침내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른다. “오이소! 고기 사이소!” 삶을 향한 절절한 외침을 시장바닥에 뿌려놓는다. 남편의 품안을 잊어버리고 다섯 아이들과 함께 독립된 삶, 씩씩한 삶을 살아내겠노라고 선언한다. 초록 잎사귀에 하얀 꽃 핀 찔레꽃처럼 초록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귀래는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고기 팔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억세게 살아낸다. 아이들도 바르고 반듯하게 자라났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나이 든 귀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한 귀래는 비로소 젊었을 적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게 된다. 굶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자식들 키워내기 위해 참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뜨거운 눈물로 되돌아본다. 남편 잃고 홀로 된 몸으로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제 한 몸을 돌아보지 않던 자신을 이제야 돌아본다. 현재의 귀래는 과거의 귀래에게 말한다. “귀래야, 이제 됐다. 참 열심히 살았다. 살아내느라 고생했다.”

 

극단 큰들의 마당극 <찔레꽃>을 본다. 앞자리에 앉은 시커먼 남자가 눈물을 찍어낸다. 왜 그런지 알 만하다. 문득 객석을 돌아보면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다. 콧물 들이마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과거의 귀래와 현재의 귀래에게서 자신을 보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부모를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현재의 귀래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도 있고 과거의 귀래에게 빙의하는 사람도 있다. 그 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신산한 삶에 대한 연민과 억척스러운 삶의 용기에 대한 응원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같다. 그런 마당극이다.

 

2023. 10. 3.(화)

ㅇㅇ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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