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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맑을 수밖에 없는 웃음과 감동

by 이우기, yiwoogi 2023. 8. 27.

큰들문화예술센터 창립 39주년 ‘큰들마을 여름축제’ 후기

 

'큰들마을 여름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관객을 반긴다.

큰들문화예술센터는 창립 39주년을 기념하여 ‘큰들산청마당극마을’에서 ‘큰들마을 여름축제’를 8월 24-26일 3일간 열었다.

 

24일 첫날은 마당극마을이 있는 물안실마을(내수리) 이웃을 초청하여 공연하려던 것인데 비 때문에 취소했다. 어쩌면 가장 뜻깊었을 공연이 취소되어 여러모로 아쉬웠겠다. 이웃들도, 큰들 식구들도 이 아쉬움을 잘 모아두었다가 다른 날, 다른 잔치를 하게 되기를 빈다. 얼른 마당극 전용 극장을 마을 안에 만들어 날씨(특히 우기) 때문에 공연을 못하는 일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둘째 날인 25일에는 소공연 세 가지, 어린이 프로그램, 축하공연, 마당극 공연을 진행했다. 소공연 세 가지는 시극(<아내와 나 사이>), 1인극(<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 음악극(<보이는 라디오>)을 각각 그림극장, 카페극장, 잔디극장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축하공연은 진주·창원 큰들풍물단이 사물놀이를 마련했다고 한다. ‘~고 한다’라고 하는 까닭은 직접 가지 않은 때문이다. 올해 창립기념 마당극 공연 작품은 한창 주가를 올리는 동의보감 힐링 마당극 <찔레꽃>이다.

 

사흘 공연 가운데 가장 풍성한 잔칫상은 셋째 날이라고 본다. 큰들에서 후원회원들에게 여름축제 일정을 알리면서 참가 신청을 하라고 했을 때 나는 셋째 날을 선택했다. 사흘 모두 가보고 싶었고 마을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첫날을 빼더라도 나머지 이틀이라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큰들을 사랑하는 사람, 큰들 마당극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어서 참았다. 200명 선착순이라고 하니. 어쨌든 셋째 날을 선택한 건 참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지원, 김강유 젊은 국악인들의 멋진 무대

 

셋째 날 일정은 오후 5시 반짝 콘서트로 시작했다. 반짝 콘서트이지만 무대는 두 가지다. 먼저 첫 번째.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연희예술전공(판소리)을 졸업한 전지원 씨가 판소리를 하고 같은 학과 재학생인 김강유 씨가 고수를 맡았다. <춘향가>에서 이도령이 춘향을 처음 만나 수작을 거는 장면을 공연했다. 김강유 씨는 처음 뵌 분이고 전지원 씨는 익히 잘 아는 분이다. 여기저기서 작은 공연을 수차례 본 경험도 있거니와 2023 경남도립극단의 <앙금당실 토별가>의 주연으로서도 만난 적 있다. 그의 소리는 참 좋다. 아무튼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목소리와 북소리의 조화로 여름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새로 문을 연 카페에서 공연했는데 공연장이 비좁았다. 큰들 단원들은 너나없이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라고 했다. ‘몰랐다’라는 말은 겸손의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지원 씨가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들려주고 있다. 고수는 김강유 씨다.

 

전지원 씨는 ‘2020년 제3회 정읍 박만순·송만갑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일반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런 쪽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이 대회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른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최우수상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또한 전지원 씨는 ‘2022 삼여류 명창 공연대회’에 참가한 적 있고, ‘2023 21세기 한국음악프로젝트’ 장려상을 수상하는 등의 경력이 있다. 2000년생 나이치고는 제법 화려하다. 아마추어는 이미 넘어섰고 프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앞으로의 더 큰 발전을 빈다.

 

김강유 씨는 산청 출신이다. 전지원 씨와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란다. ‘2022년 제42회 전국고수대회’에서 일반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2023년 5월 ‘제25회 서편제 보성 소리축제 전국판소리 고수 경연대회’에서 일반부 장원을 차지했다. 2022년 11월 ‘제1회 김강유의 첫소리, 첫장단, 첫몸짓 개인발표회’도 열었다. 이만하면 김강유 씨의 내공과 실력을 충분히 알겠다. 역시 전도양양한 젊은이다.

 

반짝 콘서트 두 번째 무대에서는 김정경 배우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아, 나는 이 아코디언 연주를 이야기하고야 말겠다. 아코디언은 평소 잘 접하기 어려운 악기이다. 기타나 드럼이나 하모니카나 피리보다는 거리가 멀다. 나에겐 그렇다. 김정경 배우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건 여러 차례 보았다. 진주 ‘공간오늘’에서 보았고 마당극 마을에서 보았다. 마당극 <찔레꽃>에도 등장한다. 아코디언의 음색에 나는 반한 것 같다. 하지만 이날 나는 다시 한번 그 아코디언에 지고 말았다.

 

그림극장과 반짝 콘서트에서 만난 고향의 정서

 

김정경 씨가 아코디언으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고 있다. 아코디언 소리도 일품이고 그의 표정도 일품이다.

 

하필 첫 곡목이 <고향의 봄>일 게 뭔가.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대목이 나오기 전 전주(前奏)에서 나는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진주시 미천면 숲골마을 어느 산비탈에서 비닐 푸대로 썰매를 타는 나를 만나고 말았다. 좁다란 개울에서 얼음을 타다 물에 빠지고 나일론 양말을 말리다가 홀라당 태워 먹는 장면도 떠올랐다. 연주는 3절로 이어졌다. 3절도 있었던가. 재 너머 밭둑에 풍개가 발갛게 익어갈 즈음이면 우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꼴 베러 재를 넘어가곤 했다. 심호흡을 했다. 벌써 눈물이 떨어지면 기나긴 행사를 어찌하려고. 고향이라….

 

집에서 오후 4시에 출발했다. 지금까지 즐겨본 큰들 관련 행사 가운데 가장 ‘버라이어티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맨 처음 발길은 그림극장으로 향했다. 박춘우 화백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이다. 화백 겸 배우 겸 미술감독인 이분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따뜻함, 고향,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분의 작품은 진주큰들놀이터 ‘공간오늘’에 가면 30여 작품이 늘 전시돼 있다. 나는 보고 또 보고 또 본다. 언젠가 멋진 작품 하나를 사야지, 라고 다짐하고 있다. 마을 그림극장에 전시된 많은 작품 가운데 유난히 커다란 작품에 눈길이 갔다. ‘내가 살던 고향은’이라는 작품은 작가 자신의 고향 마을을 그린 것이라는데, 영락없이 내 고향이었다. 고향이라. 고향이라. 반짝 콘서트에서 김정경 배우의 아코디언 연주 곡목을 미리 넌지시 일러준 것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감정의 자물쇠를 살짝 열어두게 하는 그 무엇.

 

박춘우 화백의 그림은 언제나 따뜻하다.

 

관객들은 여기 저기 탁자를 놓고 김밥과 샌드위치와 유부초밥과 커피를 즐겼다. 6시 전후 시간이면 꽤 더울 텐데, 마당극마을엔 벌써 시원한 산바람이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친구끼리, 가족끼리, 연인끼리 삼삼오오 마당극마을을 찾은 큰들 팬들이 여유롭고 한가하게 즐거운 시간을 누렸다. 멀어서 잘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부부로 보이는 모자 쓴 두 분이 마을 뒷산인 정수산 산책길을 걸어가는 게 보였다. 저분들이야말로 마당극마을을 제대로 즐기는 분이로구나 싶었다.

 

소공연은 둘째 날과 마찬가지로 세 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솔직히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동행한 아내와 김밥, 유부초밥을 먹으면서도 결정하지 못했다. 둘째 날 공연 때 1인극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시극도 보고 싶고 보이는 라디오에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가장 거리가 먼(그래봤자 2~3분밖에 안 걸리지만) 잔디극장으로 갔다. 소공연 세 작품 모두 본 적이 있어서 더욱 심해지던 갈등을 말끔하게 정리해준 박정현 단원의 한마디. “잔디극장 1인극 보러 가셔서 힘 좀 보태주세요. 가족이잖아요.”

 

담배의 해로움은 딴 데 가서 물어보세요

 

1인극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안톤 체홉의 작품을 김상문 배우 혼자서 연기하는 작품이다. 김안순 배우가 단역으로 출연하고 송병갑 연출이 음향을 맡는다. 다른 공연장에 비하면 아주 단출하고 매우 간단한 준비이다.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았던 관객들이 제법 몰려온다. 준비된 의자가 꽉 찼다. 김상문 배우가 직접 관객을 모집하러 다녔다 하는데 어디에서 얼마나 모집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참 재미있다. 웃기고 슬프다.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 강연하는 배우의 삶이 안쓰럽고, 그것에 공감하는 관객 자신 또한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길고 긴 대사를 배우 혼자서 해 나간다. 아무나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원래 대사가 있었겠지만 많은 부분은 즉흥연기(애드리브)로 진행한다. 그래서 더 웃기고 그래서 더 재미있다. 김상문 배우 연기력의 절정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만약 다음에도 세 가지 소공연을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한다면 나는 반드시 1인극을 보러 갈 것이다, 라고 다짐해 둔다. 아차, 진짜 담배의 해로움을 알고 싶은 분은 딴 데 가서 알아보시는 게 좋겠다.

 

김상문 씨가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1인극을 연기하고 있다. 보지 않은 분은 말을 말아야 한다.

 

음악극 <보이는 라디오>, 시극 <아내와 나 사이>도 이미 큰들 ‘공간오늘’에서 본 적 있다. 둘 다 뜻으로 보나 재미로 보나 어디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는다. 주어진 20분 동안 관객을 흥미와 즐거움으로 안내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셋을 동시에 각각 다른 장소에서 공연하는 건 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기도 하고 또 다른 노림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모두를 즐기고 싶은 대다수 관객들에겐 아쉬움이 아닐 수 없는 시간이었다. 소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어린이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들러볼 수 없었다.

 

그렇게 관객을 여기저기로 흩어 놓았던 큰들은 마침내 7시쯤에야 주공연장인 마당극장으로 사람을 모았다. 큰들문화예술센터 창립 39주년을 축하하는 공연과 마당극 공연을 즐길 시간이 된 것이다.

 

현해탄 건너온 축하공연단의 우정

 

축하공연은 일본에서 온 ‘로온(勞音)’의 공연으로 시작했다. 생명의 소중함을 노래와 북소리로 표현하는 일본 다이코(북) 공연이 먼저 우리를 만났다. 뒤이어 히메지와 시소 지역에서 활동하는 음악감상단체 ‘로온’ 회원들이 사물놀이를 펼쳐보였다. 큰들 단원 몇몇이 직접 일본까지 날아가서 지도했다고 한다. 흥겨우면서도 절도 있는 사물놀이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 그들에게 관객들은 우렁찬 함성과 손뼉으로 화답했다.

 

일본에서 온 축하공연단은 노래와 북, 사물놀이로 감동을 안겨 주었다.

 

일본에서 27명이 큰들 창립 39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그 마음과 우정과 진정성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정수산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한일의 메아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됐다.

 

일본 사람들의 공연이 끝나자 반짝 콘서트에서 만난 김강유 씨와 전지원 씨가 다시 등장했다. 김강유 씨는 전공이 북인데도 설장구를 들고 등장했다. 그는 혼자 서 보면 결코 좁지 않았을 마당판을 마음껏 휘저었다. 장구 하나를 자유자재로 두들기며 가락을 맞췄고 깜찍하고 재치 있는 동작과 상모로 흥을 돋우었다. 반짝 콘서트 때는 고수로서 자리에 앉아만 있었지만, 마당판에 들어선 그이는 영판 광대였고 예인이었고 청년이었다. 젊은 국악인의 대표 주자라고 해도 되겠다.

 

김강유, 전지원 씨가 멋진 공연을 선사하고 있다. 설장구에 맞춘 판소리는 낯선 만큼 흥미롭다.

 

전지원 씨는, <앙금당실 토별가>에서 토끼가 거북의 꾐에 빠져 용왕을 알현하러 갔다가 ‘이게 아니구나’ 싶어 잔꾀를 부려 도망가려던 대목을 들려주었다. 보통 판소리라면 바닥에 앉은 고수의 장단과 추임새와 아니리에 맞추는데 이날은 김강유 씨가 연주하는 설장구 장단에 맞추었다. 이색적이고 멋진 장면이었다. 두 사람의 장단이 아주 고급지고 여유로웠다. ‘지음(知音)’의 벗들에게 칭찬의 박수가 쏟아졌다. 전지원 씨는 민요 접속곡도 들려주었다. 아는 사람은 따라 부르고 모르는 사람은 손뼉을 쳤다. 아리랑이 마당극마을에 메아리칠 때 나는 감동했다. 아리랑이라서.

 

가을벌레의 교향곡을 엿듣는 달님 안녕?

 

흥이 올랐다.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반달이 마당극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언덕 위 꽃사슴에도 불이 들어왔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풀벌레 가을벌레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교향악을 연주했다. 어두움과 빛과 자연의 소리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관객들의 웃음과 손뼉, 커다란 기쁨과 즐거운 감정도 가득 피어올랐다. 여름 축제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메인 이벤트’ 힐링 마당극 <찔레꽃>을 공연할 차례가 다가온 것이다.

 

하늘엔 반달이, 언덕 위엔 꽃사슴이 축제를 구경하고 있다.

 

마당극 <찔레꽃>은 큰들이 창립 39주년을 맞이하여 후원회원과 관객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마당극은 지난해 38주년 정기공연 때도 선사한 작품이다. 동의보감촌 잔디광장과 실내 주제관에서 수차례 공연했다. 매주 목요일 마당극 마을을 찾아오는 힐링아카데미 회원들에게도 수차례 보여준 작품이다. 처음 창작했을 때로부터 1년반 기간 동안 잘 다듬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이렇게 잘 차려진 마당에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아가며 공연하는 건 몇 번 안 될 것이다.

 

<찔레꽃>은 <오작교 아리랑>, <효자전>, <최참판댁 경사 났네>와 같은 작품의 뒤를 이어 아주 오래도록 길이길이 공연될 큰들의 대표 작품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작품을 보면 안다. 말로 죄다 설명해 낼 수가 없다. 주인공 하은희 씨와 여러 배역을 감칠맛 나게 소화하는 감초 송병갑, 김혜경 씨의 연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제도, 21세기를 살아내는 우리들에게 보약처럼 좋기만 하다.

 

<찔레꽃>은 우리 인체의 오장(심장, 간장, 비장, 폐장, 신장)과 주인공 정귀래, 그리고 귀래의 오남매가 들려주는 동의보감 속 삶의 지혜와 철학 이야기라고 소개돼 있다. 아이 다섯을 남기고 남편을 여읜 귀래는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낸다. 하지만 너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탓에 병을 얻는다. 병원에 휴대폰마저 던져두고 그녀가 찾아간 곳은 친정이었다. 99살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업 다니는 영철은 몸속의 어떤 비명을 들었을까

 

귀래의 오남매 중에는 대기업에 다니는 영철이 있다. 둘째아들 영철이 대기업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큰아들 기철은 대학을 포기한다. 모두 다 대학에 보내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물론 네 형제가 대기업 다니는 영철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주 크다. 그 사실을 이웃들도 잘 안다. 영철이 다니는 대기업은 월급을 많이 줄 것이다. 회사에서 월급을 많이 주는 것은 그만큼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희생은 능력·실력을 발휘하라는 뜻이다. 실적으로 증명하라는 윽박지름이다.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도록 일해야 한다. 내키지 않더라도 술자리에 가야 한다. 주말도 저당잡힌다. 이러한 삶을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모두가 무미건조하고 실적 경쟁에 내쫓기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영철도 그러하다.

 

마당극 <찔레꽃>으로 이날 행사는 성대하고 멋지게 마무리됐다. 또 하나의 커다란 추억에 가슴에 들어왔다.

 

영철은 타고난 성품이 대도시, 대기업, 높은 빌딩, 많은 월급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대도시, 대기업, 높은 빌딩에 가둬두면 질식하고 만다. 영철은 자기 몸이 지르는 비명을 일찌감치 들었다. 사표를 냈다. 집에는 말하지 않고 인도로 여행을 간다. 거기서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스카프를 사서 부친다. 효자다. 영철은 오래전부터 틈틈이 고향마을을 찾아가 자신만의 꽃동산을 꾸몄다. 대기업에서 받은 월급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끝내 사표를 썼고 퇴직금으로 꽃동산을 마무리지었다. 영철은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놓고’ 살지는 못할지언정 콘크리트로 치장한 도시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젊은이는 아닌 것이다. 대기업 다니면서 숨막혀 죽을 것 같던 일상의 옥죔을 과감히 던져버린 것이다. 부럽다, 정녕.

 

<찔레꽃>은 정귀래의 인생이 주요 이야기다. 그녀의 행복과 불행, 신산한 삶, 그리고 마침내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관객들이 소리 없이 함께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작품이다. 모두 그렇게 한다. 주변에 앉은 관객 여러 명이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훔치고 콧물을 닦는다. 나 또한 그랬다. 아내는 바로 앞에 앉은 어른들이 눈물을 쏟는 바람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울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날은 영철의 삶이 더 크게 다가왔다. 영철에게 내 감정을 이입했다. 그의 삶과 고통과 고독, 그리고 비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40-50대 가장이 과로로 쓰러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경제발전, 국가발전의 주역으로 칭송받는 한편에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가혹하게 빼앗기는 가장이 많다.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 꿈이 어디에서 누구의 이익에 잡아 먹히는지조차 모른 채, 자신의 건강을 갉아먹는 가장이 많다. 정귀래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영철이들도 자신의 몸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어야 한다. 큰들은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들려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머니 귀래도 그러하고 그의 아들 영철이도 그러하듯, 우리는 자기 몸속의 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새들의 노래와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찔레꽃>은 사막을 건너는 우리들에게 오아시스의 물을 마셔보라고 권유하는 작품이다. 

 

큰들의 경험과 역량을 집대성, 총체화한 멋진 행사

 

큰들문화예술센터 창립 39주년 행사 ‘큰들마을 여름축제’는 그동안 큰들이 해오던 여러 형태의 공연을 집대성, 총체화한 행사였다고 본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하던 창립 기념 공연, 마당극마을에서 하던 창립 기념 공연, 진주큰들놀이터 ‘공간오늘’에서 하던 작은 공연, 매주 마을을 찾아오는 힐링아카데미 회원들에게 보여주던 공연, 지난해 마당극마을에서 주말마다 열던 주말N마당극마을 행사,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해오던 여러 공연, 일본 독일 라오스 등 해외에서 해오던 여러 공연 등 모든 경험과 실력과 능력을 총체적으로 결집한 행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당극장에 임시 무대를 설치하는 것, 밀려드는 차량들을 안전하고도 질서정연하게 안내하는 것, 그보다 먼저 후원회원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누리집과 페이스북 등에 공지를 올리고 참가자를 접수하고 그들에게 안내 문자를 보내는 것, 행사 포스터를 만들고 작은 전단을 만드는 것, 행사 날 도착한 관객들에게 종이로 된 입장권과 팔찌를 배부하는 것, 일본에서 온 손님을 마을 곳곳에 안전하고 쾌적하게 모시는 것, 강원도를 비롯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친절하고도 진정성 있게 모시는 것, 하도 자주 만난 터라 마치 한 식구처럼 여겨지는 친한 손님들을 상냥하고도 반갑게 맞이하는 것 등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고 흐트러지는 게 없고 어색한 게 없다. 직접 가 보면 안다. 큰들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큰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가장 많은 애정을 쏟는다. 한 편을 만들 때 모든 단원들이 공동창작하듯 하는 것 같다. 한 번 만든 작품을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각각의 공연장소와 관객과 날씨와 시국의 사정에 따라 무대와 소품과 대사와 의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간다. 배우도 필요에 따라 사정에 따라 바꾼다. 한 번 관람한 작품이라고 하여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들을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9년 큰들 역사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드는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행사가 관객의 입맛에 맞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해 두고 싶다. 큰들 단원 말고 단체복을 입고 이름표를 단 청년이 많았다. 원주와 서울에서 달려온 도우미라고 한다. 큰들은 행사를 하기 전에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원주에서 미니특공대 팀이 스태프로 도움주러 오셨구요. 20대 청춘들도 스태프로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 뒤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스태프를 도와주러 왔던 14명의 청춘들은 점심 짜장면 한 그릇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들에게도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나와 아내가 김밥과 유부초밥과 커피를 의자에 놓고 다른 의자에 앉아 요기를 하고 있을 때 그들은 묻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테이블을 갖다 주며 편안하게 앉아서 먹으라고 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일일이 모기기피제를 뿌려도 되느냐 물어주기도 했다. 모기향을 피우는 일도 그들이 했다. 주차 관리하는 데도 몇 명 보였다. 

 

큰들문화예술센터 창립 39주년 기념 <큰들마을 여름축제> 공연 안내 포스터. 젊은 단원들이 만들었다고 들었다.
나는 사흘째인 8월 26일 첫 번째(001번) 손님이었다.

 

이날은 내가 그 어떤 기대를 하였든 간에, 그 이상의 이상의 이상이었다. 첫 번째 이상은 ‘수준의 높이’를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이상은 ‘진정성의 높이’를 말하는 것이고 세 번째 이상은 ‘감동의 높이’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미리 그 높이를 정하여 두고 마당극장을 찾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공연이나 행사를 마치고 나면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큰들은 언제나 그렇다. 앞에서 한 말을 한 번 더 강조해 본다. 큰들은 작품을 이전에 했던 것과 다르게 한다. 이전에 보여준 것을 똑같이 되풀이하여 보여주지 않는다. 이전의 반응을 보아가며 새롭게 고치고 다르게 바꾼다. 기시감을 자극해 놓고는 결국은 다른 그 무엇으로 더 큰 감동을 준다. 관객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웃음을 터뜨릴지 잘 알기 때문에 슬쩍 허방다리를 놓음으로써 놀람, 감탄의 감정을 느닷없이 터뜨리게 만든다. 예비되지 않은 웃음과 감동은 맑을 수밖에 없다. 자기도 모르게 빵 터지는 웃음, 자기도 모르게 줄줄 흐르는 눈물. 곳곳에서 느끼는 그들의 정성과 배려, 그리고 준비에 감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여름축제 역시 그러하였다.

 

내년 창립 40주년을 벌써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내년이면 큰들문화예술센터 창립 40주년이 된다. 큰들은 1984년 창단하여 39년째 전국 방방곡곡과 일본, 라오스, 유럽 등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당극 전문 예술단체이다. 큰들은 웃음과 감동을 주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공연하고 있다. 또한 각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 인물을 이야기로 꾸며 마당극 작품으로 만드는 활동을 무척 열심히 잘 하고 있다.

 

올해 9월 15일부터 10월 19일까지 산청군 동의보감촌 일원에서 열리는 산청 세계전통의약항노화 엑스포 기간에는 마당극을 17번 정도 공연한다고 들었다. 나는 입장권을 8장 구해놓았다. 어느 작품을 언제 할지 궁금하다. 공연장 위치는 들어서 대강 안다. 동의보감촌은 하도 자주 가서 눈감고 더듬어서라도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내년 큰들 창립 40주년에는 과연 어떤 멋진 행사와 공연으로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줄지 벌써 설렌다. 설레는 마음 한량없다. 큰들 후원회원이라는 것이 그저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2023 8. 27.(일)

이우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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