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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2021년 한 해 정리

by 이우기, yiwoogi 2022. 1. 3.

<한 해 정리>

 

연말이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이맘때 ‘올해 나에게 일어난 몇 가지 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누리방에 올렸다. 기억하고 고마워하고 뉘우치기 위해서이다. 보통 5가지를 골랐다. 한 해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일은 퍽 중요하다. 올해는 어떤 일이 있었나 살짝 되돌아본다. 몇 가지 떠오른다. 즐거운 일이 많다. 다행이다.

 

(1) 군대 간 아들 면회를 처음 다녀왔다

 

아들은 2020년 8월 24일 공군으로 입대했다.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지원했다. 코로나 상황에서 강의가 정상으로 진행되지 않는 터라 전략상 매우 훌륭한 선택이다. 그 무덥던 날 오후 2시 진주시 금산면에 있는 공군교육사령부로 갔다. 그 앞날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발사 아저씨는 나에게 기계를 넘겨주며 직접 깎아 보라고 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기계를 놀렸다. 입대하는 날 금산면에 있는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었다. 무엇이라도 든든히 먹여 보내려는 마음과 불과 1시간도 남겨두지 않은 입대 시간 앞의 긴장감으로 숟가락을 들지 못하던 아들의 마음이 서로 눅눅했다. 햇볕은 쨍했다.

 

그렇게 입대한 아들은 공병장비운전이라는 주특기를 받았다. 다른 동기들이 2-3주 특기교육을 받을 때 공병장비운전병은 충주까지 가서 5주 동안 교육을 더 받았다. 기본군사훈련단 점수와 특기학교 점수를 합하여 자대 배치 우선권을 주는데 운 좋게도 사천으로 왔다. 제3훈련비행단은 진주 집에서 아무리 천천히 가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이다. 무엇보다 겨울에 춥지 않다는 것이 마음 놓이게 했다.

 

아들은 11월 초에 3박 4일 첫 휴가를 나왔다. 그리고 불과 며칠 만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청원휴가 2박3일을 나왔다. 아들이 첫 휴가 때 요양병원에서 의식도 없이 누워계신 할머니를 뵙고 나왔다. 손을 잡아드렸는지 모르겠다. 4월 6일부터 2주간 휴가를 나왔다.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학교에 가 보고 잠도 자고 하다 보니 세월이 흘러 버렸다. 4월 19일 복귀했다. 복귀하기 전날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으련다.

 

7월 1일 2주간의 휴가를 얻었다. 더운 여름의 한 부분을 집에서 시원하게 지냈으면 했다. 여유를 부리며 군대생활을 잠시라도 잊기를 바랐다.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7월 14일 복귀하는 날 부대 앞까지 태워주었다. 그 사이 아들 생일이 있어서 족발집에 앉아 케이크를 주문해 놓고 짧게 노래를 불렀다.

 

면회를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부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으로는 면회를 허용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다가 부대 내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우리를 아득하게 했다. 드디어 10월 말이던가 11월 초던가. 아들이 반가운 소식을 알려왔다. 토요일 오전, 오후와 일요일 오전, 오후로 나누어 면회 신청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장 신청하라고 했다. 병장 계급장 달 때까지 면회를 한 번도 못했으니 그건 정당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첫 주에는 실패했다. 다른 병사들도 앞 다퉈 면회를 신청한데다 결정적으로 행정병이 우리 가족의 면회를 누락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었다. 아들도 실망했고 우리도 서운했다. 시기를 기다려 도전해 보자고 했다.

 

그런 우리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11월 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면회가 결정됐다. 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에는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멀리 충청도나 강원도로 발령 나면 주말에 데이트 삼아, 여행 삼아 면회라도 자주 가자.’ 그런데 가까운 사천으로 온 데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라는 걸 한번이라도 갈 수 있을까 싶던 것이다. 면회 결정 소식을 들은 뒤부터 며칠 동안 참 많이 설레었다. 휴가 때 부대 앞까지 데려다 준 적이 있어서 위병소 풍경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부대 안까지 들어가는 건 처음 아닌가.

 

넓디넓은 식당 안에 다섯 가족이 띄엄띄엄 앉아 준비해간 음식을 먹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당 안은 춥고 바깥 햇볕이 오히려 따뜻해 보여 바깥의 벤치에 잠시 앉아 쉬기도 했다. 대본이 준비되어 있는 행사가 아니라서 앞뒤 없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예정된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보다 늦게 온 사람들도 우리보다 먼저 일어났다. 갈 길이 먼 사람들 같았다. 우리도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아들과 헤어졌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무조건 면회 신청을 하라고는 했지만, 주말에 40가족만 면회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병장에다가 집도 가까운 아들이 면회를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지는 않을 것임을 눈치 챘다.

 

그런 아들이 12월 12일 카톡을 보내왔다. 당초 예정대로라면 2022년 5월 22일이 만기전역일인데 그동안 밀린 휴가를 계산하여 3월 21일경 미복귀 휴가를 나오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면 그동안 60일가량 되는 휴가를 사용하지 못한 셈이다. 그 휴가를 모두 사용했다면, 우리도 어느 부모처럼 “휴가 좀 그만 나오라”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코로나 때문에 휴가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부모가 자식의 군대생활을 더 애틋하게 여기도록 해 준 것이다. 아무튼 전역하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면회라는 것을 가 본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추억이다. 올해 나에게 일어난 일 첫 번째에 올려놓는다. 석 달쯤 남은 복무 기간 동안 한번쯤은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큰아버지, 큰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큰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둘뿐인 형제다. 두 분은 사이가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큰아버지는 말년에 병원에 오랫동안 누워 계셨다. 진주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면회를 가곤 했는데 부산에 입원해 계실 때에는 가보지 못했다. 큰형이 대표로 갔다 와서 안부를 전했다. 돌아가신 날짜는 2020년 음력 12월 7일이다. 큰아버지 산소 쓸 일 때문에 사촌 간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아래에 큰아버지, 큰어머니를 모실 것으로 생각하던 것인데 그것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내가 아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큰아버지 돌아가신 뒤 6개월 뒤 큰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음력으로 2021년 6월 11일이다. 두 분이 생전 얼마나 금슬이 좋았는지 알겠다. 사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산소를 잘 마련하였다. 2010년에 유명을 달리한 사촌 동생도 잘 모셨다. 

 

3. 극단 큰들 마당극을 야외에서 22회 보았다

 

2020년에 비해 2021년는 큰들에게 더 큰 시련의 시간이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그나마 띄엄띄엄 공연을 한 것은 다행이다. 산청 동의보감촌에서 주말 야외공연을 겨우겨우 해 나갔다. 추석 명절 전후, 그러니까 산청 한방약초축제 기간에는 비대면으로 공연했다. 마당극 공연에 필수적인 관객 몇 명만 앉혀놓고 마당극을 공연했다. 그 장면을 유튜브로 중계한 것이다. 추석 당일 본가에서 형제들과 마당극을 보았다. 산청에서는 예년의 절반 정도는 공연한 것 같다. 하지만 하동 공연은 한 번도 없었다. 하동군청에서 예산을 지원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극단 큰들은 그 와중에 5월에는 <오작교 아리랑>을 200회 공연하는 기록을 세웠다. 2018년 7월 <효자전> 200회에 이은 기록이다. 하동에서 열리는 <최참판댁 경사 났네>는 190회를 넘긴 지가 꽤 됐는데 200이라는 숫자를 넘지 못했다.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2020년 7월 첫 공연한 <정기룡>도 횟수를 높여가지 못했다. 역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마당극을 야외에서만 22회 관람했다. 주말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산청 동의보감촌으로 달려갔다. 어떤 주에는 공식 출장으로 관람을 포기해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출장이 연기되었다. 사천 제3훈련비행단으로 아들 면회를 갔다 온 날도 산청으로 갈 시간이 넉넉하여 포기를 관람으로 바꿔 놓았다. 마당극을 보면서 많이 웃었고 울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동의보감촌 기천문 앞에 새로 문을 연 ‘청이네’에도 여러 번 가 보았다. ‘청이네’는 큰들이 새롭게 시작한 식당트럭, 음식트럭이다. 푸드트럭이라고들 하더라. 거기서 빵도 사 먹고 샌드위치도 사 먹고 차도 사 마셨다. 손님이 줄을 선 장면을 보면서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추억을 쌓았다. 22회 관람은 횟수로는 지난해, 지지난해에 비해 훨씬 적지만 공연횟수 자체가 줄어든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성공한 셈이다.

 

9월 4일과 11일 산청 마당극 마을에서 창립 37주년 공연을 했는데, 나는 4일 공연을 보았다. <오작교 아리랑>을 보면서 역시 감동하고 역시 감탄했다. 하지만 그날 공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당극마을 뒤 정수산을 무대로 펼쳐진 특별공연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큰들만이 상상할 수 있고 큰들만이 그 상상을 눈앞의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22회 관람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밤이었다.

 

해가 가기 전에 나는 ‘2021년 큰들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인 사진첩과 큰들 달력을 만들었다. 사진첩은 이 세상에 두 개뿐이다. 하나는 내가 갖고 있고 하나는 큰들로 보냈다. 달력은 네 개를 만들어 하나만 내가 가졌다. 이 달력에는 2022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적어 넣은 게 아니다. 2020년, 2021년 마당극 공연이나 기억할 만한 큰들의 기념일이 빼곡이 들어 있다. 한 해를 넘기면서 이렇게 기억할 만한 일을 해낸 게 스스로 대견하다. 내년에는 얼마나 공연을 볼 수 있을지 기대하는 것도 연말에 내가 갖는 즐거움이자 설렘이다.

 

4. 대학이 통합하여 홍보실 사무실을 옮겼다

 

경상대학교와 경남과학기술대학교가 통합하여 2021년 3월 1일자로 경상국립대학교가 되었다. 가좌동 옛 경상대에 있던 홍보실은 칠암동 옛 경남과기대 캠퍼스로 옮겼다. 총장실, 기획처, 대외협력처, 사무국이 옮겼는데 홍보실은 대외협력처 소속이다. 원래 경남과기대에서 홍보를 담당하던 직원이 우리 식구가 되어 5명으로 홍보실이 커졌다. 통합한 첫 해이니 일이 많지 않을 수 없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 사이 4월 30일자로 가좌동 시절부터 함께하던 직원 한 명이 그만두었다. 전문적 능력과 직업의식과 일을 하려는 열정과 동료 사이의 붙임성 어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친구인데, 아쉽고 안타깝고 미안하다. 그가 감당해야 했을 많은 정신적 중압감을 나는 모두 헤아리지 못했다. 알았던 것도 있는데 해결해 주거나 막아주지 못했다. 그래서 미안하다. 부럽기도 하다. 

 

5. 경상국립대 국어문화원 사업에 참여했다

 

경상국립대 국어문화원이 경남도청 보도자료를 분석하는 사업을 맡았는데 나도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내가 맡은 일이 보도자료 작성이어서 내 경험이 그 일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면 나는 국어문화원 연구원들과 7-8개월 일하면서 그동안 내가 써온 보도자료를 되돌아보았고 심하게 부끄러웠다. 현장에서 겪은 경험과 학술적·이론적 기준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더 나은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제공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었고 그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요령을 피우거나 잔꾀를 부리지는 않았다. 나의 무지를 깨치기 위해 무진 노력했다. 하지만 경남도청의 보도자료를 뜯어보면서 우리 대학교의 보도자료도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을 크게 깨쳤다. 아무튼 경남도청 보도자료 분석 보고서는 12월말 인쇄하여 도청에 납품했고, 우리는 무사히 일을 마쳤다. 그 과정에서 국어문화원장과 연구원들의 실력과 노력과 정성과 진정성을 크게 배웠다. 반성할 점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이런 반성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우리말과 관련하여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말이라기보다는 문장을 잘 쓰기 위한 글이다. 이미 보도한 여러 언론사의 기사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어떡하면 더 쉽고 간단하게, 이해하기 쉽게 쓸 수 있을지 공부하기로 했다. 그 공부 결과는 페이스북에 하루 한 꼭지씩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제목은 '이런 기사 문장이 있다'이다. 그 마음을 먹은 건 오래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일을 저지를지 궁리하다가 해를 넘길 듯하여 11월 어느 날 문득 첫 번째 글부터 올리고 말았다. 그 뒤로 웬만하면 하루 한 꼭지씩 쓴다. 기사를 읽다가 문제가 있거나 좀 다르게 써도 되겠다 싶은 문장을 만나면 따로 모았다가 집에 와서 저녁 시간에 공부했다. 내가 쓰는 게 맞다,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언론 보도 문장이라면 어떠해야 할지 자꾸 물어보고 있다. 1년은 해보리라 생각하는데 어떨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국어문화원에서 배운 것과 평소 책을 읽으면서 배운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나만의 문장 쓰기 연습 공책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 친구들의 댓글이 응원이 된다.

 

6. 그 외 기억나는 일들

 

-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회를 마무리했다. 2019년 9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으로 일했다. 28개월 동안 쓴 보고서가 대략 200장 가까이 될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나 역대 위원들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어서 스스로 평가는 유보한다. 평가위원이라고 ‘평가’에만 무게를 두기보다 함께 고민해 보자, 잘하는 사람들 힘을 주자 이런 생각이었는데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몇 해 뒤 다시 기회가 오면 한번쯤은 더 해보고 싶다.

 

- 2020년 7월 한국대학홍보협의회 이사를 맡게 되었다. 이런 자리 맡는 걸 정말 정말 싫어하는데 어쩌다 그리 됐다. 제주에서 홍보협의회 여름 세미나를 했는데 다녀왔고, 여수와 목포에서 임원 워크숍을 했는데 바람도 쐴 겸 바쁜 일을 미뤄두고 다녀왔다. 다른 대학에서는 어떻게들 하는지 궁금했으나 그런 것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 대신 전국에서 찾아온 홍보협의회 임원들 면면을 알게 됐으니 ‘인적 네트워크’라도 만든 것이 재산이라면 재산이다. 6월에 열린 홍보협의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이 유임되어 모든 임원이 자동 유임되었다. 따라서 이사라는 직책도 2022년 여름까지는 갈 듯하다.

 

- 가족끼리 난생 처음 바다낚시를 해보았다. 나는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추석에 큰형님이 제안한 것을 기어이 실현한 것이다. 아니다. 모든 형제가 참석하면 좋았겠는데 창원 작은형은 참석하지 못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동 진교 앞바다에서 밤새 둥둥 떠서 고기를 잡았다. 돼지고기를 사 가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만큼 잡았다. 거기서 나는 가족달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12월에 형제들의 기념일을 받아 적었고 사진들을 파일로 받아 하나에 1만 2800원 하는 달력을 만들었다. 만들고 나니 긍정적인 반응은 별로 없고 시큰둥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이 더 컸다. 2023년 달력은 안 만들어야지 다짐하고 있다. 그래도 올해는 조카들마다 생일 때 작은 선물이라도 보낼 다짐을 하고 있으니 기쁘다.

 

- 난생 처음 대장 내시경을 했다. 건강검진 덕분이다. 그동안 위 내시경은 건강검진 때마다 했다. 대장은 무서워서 하지 않았다. 그냥 분변잠혈을 검사하는 것으로 대장암 검진을 대신했다. 그러다가 어느 병원 의사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꼭 대장내시경을 받겠노라 약속했고 6월 어느 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스스로 약속을 지켰다기보다 의사와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어쨌거나 장청결제 먹고 밤새도록 화장실 들락거린 기억은 오래 갈 것이다. 그리고 위, 내장 모두 큰 문제는 없어서 크게 안도한 기억도 남았다. 이제 정기적으로 검사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게 뭣이라고 걱정되어 함께 따라가 준 아내가 무척 사랑스럽고 고맙던 기억이 있다.

 

- 42년 만에 고향 어른을 모시고 식사를 했다.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숲골마을을 떠난 건 1979년 3월이다. 2021년 어느 더운 날 이웃사촌 어르신 두 분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했다. 동생이 적극 나서준 덕분이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그랬더라면 얼마나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눈물부터 눈앞을 가리던 것이다. 우리 집이 있던 옛터를 가 보았다. 대밭과 그냥 밭이 있었다. 어릴 적 추억이 낱낱이 생각났다. 담방구 하며 뛰어다니던 고샅고샅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닭장에서 닭 모가지를 비틀며 걸어오던 아버지도 보였다. 마당에 우리를 순서대로 앉혀놓고 머리를 깎아주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던 담배냄새도 그대로 느껴졌다. 감나무, 석류나무, 수돗가, 외양간, 가죽나무, 부엌 들의 위치와 모양이 그림처럼 사진처럼 떠올랐다. 늙수그레하게 배가 튀어나온 나그네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우리를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사람처럼, 친자식처럼 반갑게 맞이해 준 옆집 어른 두 분께 정말 감사드린다.

 

- 자신의 역량이 크게 모자람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건 할 말이 없다. 올해 처음 안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역량을 채울 재주가 없으니 이 묵직하고 크나큰 자리를 얼른 비켜줘야 한다. 올해 목표는 이것이다.

 

이런 일을 정리하여 기록해 놓으면, 아주 나중에 인생 전체를 되돌아볼 때 무척 요긴할 것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설명할 때도 써먹을 수 있다(궁금해 하지도 않겠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이 글은 초안이다. 가끔 다시 뒤적여 보면서 고치고 더해 나갈 것이다.

 

2022. 1. 3.

지각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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