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사무실에 나갔다. 급한 원고를 급하게 정리했다. 학생 네 명이 나와서 저희들끼리 회의를 했다. 그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5시간은 걸리겠지 싶던 일을 얼추 2시간 만에 끝냈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른다.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한다. 집에 와서 잠시 드러누웠다. 한 주일이 파란만장하구나 싶어졌다. 파란만장한 한 주가 또 기다리고 있다. 허리가 욱신거린다. 머리는 멍하다. 5시에 다시 일어났다.
세 가족이 어머니를 모시고 큰형님 집으로 갔다. 큰형님 집 옥상에서 전을 펼쳤다. 동생이 미리 와서 숯불을 피웠다. 구이용 돼지고기와 장어를 샀고 술을 샀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아들들과 어머니의 며느리들과 어머니의 손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맛있는 장어와 돼지를 구워 먹었다. 소주와 맥주도 마셨다. 바람은 시원했다. 해는 구름 뒤로 숨었다. 해가 지자 불이 들어왔다. 이야기는 늦도록 이어졌다. 모두 모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모여 떠들며 놀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에 반비례하여 뱃속은 불편해지지만, 아무튼 좋다.
일요일엔 늦잠을 잤다. 늦잠이랬자 7시를 넘기지 않는다. 11시에 친구를 만나 그의 농막으로 놀러 갔다. 누추한 데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고 했지만 나에겐 천국이다. 거기는 내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 문자도 카톡도 오지 않고 페이스북도 열리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에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그 어떤 연락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전화기를 빌려 일과 관련한 전화를 한 통 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 받은 전화 덕분이라고 해 둔다.
닭을 삶았다. 1시간 동안 고았다. 밤과 마늘을 넣고 당귀뿌리도 넣었다. 닭 익는 냄새가 미천면 미곡리 어느 얕은 골짝으로 퍼졌다. 비는 내렸다. 비는 조용히 내렸다. 가수 이선희와 조용필과 조미미가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댔다.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아늑한 천국에서 3시간쯤 쉬었다. 술은 기분 좋을 만큼 마셨다. 전날과 전전날의 전적이 있는지라 조금만으로도 충분했다.
친구가 가꿔놓은 밭에서 방울토마토, 풋고추, 상추, 깻잎 따위 푸성귀를 땄다. 고추는 약간 매웠다. 상추는 부드러웠다. 닭을 뜯어 먹으면서 시간이 그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주면 더 좋겠다 싶었다. 빗소리와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기분을 가라앉혔기에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노래라도 고래고래 불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 뒷일은 누가 어찌 감당했을지 모른다.
집으로 돌아왔다. 비는 쉬지 않았다. 자동차 바퀴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집에 와서는, 일요일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월요일 아침에 필요한 짧은 보고서를 썼다. 바쁜 월요일 아침 허둥대지 않아도 되게 됐다. 다행이다. 보고서는 며칠 내로 행사라는 이름의 일로 되돌아올 것이다. 산 하나를 넘으면 다른 산을 만난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다른 모퉁이를 만난다. 높은 산도 있고 낮은 산도 있다. 넘고 건너다 보면, 그렇게 가다 보면 길도 없고 산도 없고 강도 없고 계곡도 없는 어떤 세상을 만날지 모른다. 모두가 그런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지만 나는 무미건조한 그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늦게 만나고 싶다. 일요일 보고서를 쓰는 까닭이다.
먹다 남은 닭죽을 싸 왔다. 전자렌지에 데워 저녁 끼니를 때운다. 뜯어온 푸성귀는 쌈장에 찍어 먹는다. 아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요일이 다 가는 아쉬움조차 없을 수 없어 동동주 한 잔을 들이켠다. 할 일을 다 한 듯하지만 실은, 지금부터 한두 시간 집중하여 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서 이렇게 앉았다. 재미 없는 주말 보낸 이야기를 쓰는 것은 손가락 준비운동이라고 해 두자.
2020. 7. 12.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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