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가니 8시 8분이었다. 휴일 출근 치고는 빨랐다. 눈알에 힘을 주고 읽고 쓰고 다시 고쳐 썼다. 처리한 일 목록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점심은 국수나 라면으로 때우고 오후 서너 시까지는 개겨야겠다 싶었다. 12시 30분쯤 아슬아슬하게 컴퓨터를 껐다. 머릿속 회로가 멈추어서면 컴퓨터도 꺼야 한다. 지난날 술자리를 탓할까 나이를 원망할까.
아내에게 전화했다. 비빔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국수 장인이다. 집에 들어서니 국수를 비비고 있다. 열무국수 국물을 이용하여 물국수도 말았다. 세 가족이 둘러앉아 후루룩 후루룩 맛나게 먹었다. 정치영이 준 덕산 동동주도 한 잔 맛좋게 들이켰다. 세상에 이렇게 어울리는 맛이 있다니. 최고의 오찬이었다.
잠시 페이스북에 들어갔다. 극단 큰들이 슬픈 소식을 올려놓았다. ‘큰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는 일본 문화단체 <히메지로온>의 전 사무국장 츠쿠타니 오사무 님의 장모님이자, 츠쿠타니 카즈미 님의 어머니 후지이 치요코 님께서 어제 아침, 만 106세 연세로 돌아가셨답니다. (한국 나이 107세)’라고 써 놓았다. ‘평소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가족 분들이 불러드렸는데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라는 말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오늘 먹은 비빔국수는, 그러니까 큰들의 벗, 일본의 문화단체 ‘히메지로온’의 츠쿠타니 오사무 씨와 그 동료분들이 보내준 것이다. 큰들은 이 국수를 맛이나 보라며 조금 보내주었는데 그것을 마침 오늘 삶아 먹은 것이다. 먹을 때도 고마운 마음이 전해져 와서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는데, 다 먹고 나서 슬픈 소식을 보자 눈물이 흘렀다.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뵌 적 없고 이름조차 나에겐 낯선 이국의 할머니 한 분의 죽음이 마음 깊숙이 들어앉는다.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이 오후 내내 잊히지 않는다. 그런 분의 딸과 사위였기에 극단 큰들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왔구나 싶다. 근래 100년이라면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결코 평화롭지 않은 시절이었는데도 이분의 얼굴에서는 나라나 겨레라는 개념을 훌쩍 넘어선 더 큰 평화와 더 큰 행복이 느껴진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두 단계의 계단이 있다. 내가 큰들을 알고 큰들이 할머니를 안다. 만약 더 오래 사셨다면 어쩌면 우리는 만날 수도 있었던 인연이다. 아니다. 할머니의 자녀들이 보내준 국수 한 다발로 우리는 벌써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 할 수 있다. 인연을 확인하는 날, 바로 그날 사망 소식을 듣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국수 한 그릇으로 맺어진 인연일지라도 나는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영전에 인사 올린다. “부디 평안하게 영면하시길 빕니다.”
2020. 7. 5.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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