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라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고불고불한 면발 사이에 젓가락을 비스듬히 꽂고 싶을 때가 있다. 후후 불어 후루룩 후루룩 삼키며 혀끝의 감각을 불러내고 싶을 때가 반드시 있다. 배고픔 탓도 아니고 날씨 때문도 아니다. 막연하게 그런 날이 있다.
이런 날엔 대호분식으로 간다. 다섯 번 정도 갔다. 경상대 북문에서 몇 발짝 걸으면 보인다. 좁다란 실내엔 라면 냄새, 비빔밥 냄새, 돈까스 냄새, 만두 냄새가 섞여 있다. 뱃속에선 꼬로록 소리가 자동으로 나온다. 주인장과 안면을 트지 않아 아지매 성격은 잘 모른다.
라면은 꼭 1인용 작은 냄비에 끓여야 맛있다. 냄비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 맛난 것 같다. 냄비 시울이 쭈그러지고 까맣게 그을렸으면 더 맛날 것만 같다. 라면 맛이 밀가루와 스프와 달걀과 파의 조화로움으로 탄생하는 것이란 말이 무색하다.
달걀을 훼훼 저어 풀어버리면 뻑뻑해진다. 적당히 풀고 적당히 뭉쳐야 하는 게 달걀이다. 대호분식 라면 달걀은 꼭 내가 바라던 모양대로다. 젓가락으로 집어 먹어도 되고 숟가락으로 떠 먹어도 된다. 라면에 달걀이 없었더라면 라면은 무엇으로 완성됐을까.
무심코 얹어놓은 듯한 깍두기와 자잘하게 썬 단무지도 한몫한다. 열 젓가락 될까 말까 한 라면 냄비가 비워질수록 깍두기와 단무지도 사라져 간다. 모자란 듯하지만 절대 모자라지 않고 남을 것 같지만 남기지 않을 만하다. 달걀이 1등 공신이라면 깍두기와 단무지는 2, 3등을 다툴 테지.
혼자 편하게 앉아 펑퍼짐한 자세로 젓가락질한다. 가락가락에 엉긴 추억과 기억을 먹는다. 어릴 적 동생과 먹던 부족한 라면, 군대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먹던 라면, 추운 겨울 늦은 밤 안주삼아 먹던 라면 들이 떠오른다. 고등학생 시절 야간자율학습 마치고 11쯤 돌아온 아들에게 연탄불에 삶아주던 어머니표 퍼진 라면이 가장 그립다.
라면 한 그릇 먹으면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한다. 국물 떠먹으며 지난주 마신 소주의 짜릿함을 생각한다. 말끔하게 비워버린 냄비를 내려다보면 아차, 막걸리가 있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싶어진다. 마지막까지 졸깃함을 잃지 않은 대호분식 라면 한 그릇 덕분에 오후에도 힘내어 열심히 읽고 쓸 수 있겠다.
2020. 7. 4.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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