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에는 늦봄이 한창이다. 봄은 봄대로 아름답지만 여름을 기다리는 마음이 함께하기에 더욱 소중한 시기다. 하동군 악양면 무딤이들에 봄이 가득하니 곧 여름으로도 가득하다. 못자리 논들엔 물이 가득하다. 들판 한가운데 선 부부송은 송홧가루를 털어내어 버린 채 그리움으로 설레고 있다. 텅 빈 넓은 공간에는 무형과 무상의 것들로 꽉 차 있다.
5월 23일 토요일 10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하동으로 가려는 것이다. 텅 빈 들판에 꽉 찬 그 무엇을 보고 싶었다. 진주에서 독서모임을 하는 몇몇이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박경리문학관’ 사무국장으로 있는 하아무 형을 만나러 갔다. 나도 하아무 형을 만나고 또한 독서모임 몇몇을 만나 보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아무 형을 만나고자 하는가.
하아무 형은 얼마 전에 소설집 ≪푸른 눈썹≫을 냈다. 그러니까 하아무 형은 소설가이다. 하동에서 태어났고 경상대를 졸업했다. 대학생 때는 울력문학회에서 시를 썼고 졸업 후 진주청년문학회 회장으로 일했다.
공식 약력은 다음과 같다. 2003년 ≪작가와사회≫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08년 MBC창작동화 대상을 수상했다. 2018년 경남민족예술인상, 2019년 경남작가상을 받았다. 소설 ≪마우스브리더≫, ≪황새≫, 동화 ≪두꺼비 대작전≫이 있다.
형은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가까이 살았으면(하동이 먼 곳은 아닌데) 이런 것들을 핑계로 수없이 만나고 마시고 떠들었겠다. 책을 여러 권 내는 사이 출판기념 행사도 변변히 하지 못했다. 이번에 낸 소설집을 구실로 삼아 얼굴이나 한번 보자 하던 것이었는데 이날이 그날이 됐다.
‘대박터고매감’이라는 식당에서 수채화 같은 비빔밥을 먹었다. 여섯이 밥상 두 개에 나눠 앉아 막걸리 한 잔씩 돌리고 닭볶음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추억이 방울방울 떠올랐으나 낱낱이 말할 수 없었고 들추어낼 수 없었다. 하얀 웃음 사이로 이심전심으로 짧게 추억을 나누었다.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고향 하동에서 둥지를 틀고 앉은 하아무 형이 소설가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어쩌면 문학회를 하던 많은 사람 가운데, 아직도 작품을 쓰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형이 우리들의 대표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울력문학회 출신 작가는 강미, 김진희가 있고 진주청년문학회 출신 작가로는 김석봉, 이순수가 있다. 더 있는데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기억나는 대로 추가해 넣기로 하고.
소설집 ≪푸른 눈썹≫에는 9편의 중단편이 들어 있다. 6편을 읽었고 3편은 남겨 두었다. 작품들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운 삶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읽는 고통 때문에 책을 덮어 둔 것이다. 삶의 구석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픔은 우리 현대사와 연결돼 있고 사소한 일상의 비극으로 연결돼 있고 세월호와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속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심호흡이 필요하다.
이 책이 많이 팔려 많이 읽힘으로써 평범한 우리가 주변에 평범하게 늘린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일에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그들의 고통의 일부라도 나눠 가짐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픔에 공감함으로써 그 아픔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이 있음을 문득문득 느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작가가 느끼고 겪고 생각한 일들에 공감함으로써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출판사가 공식 발표한 책 소개 글 가운데 조금 옮겨 놓는다. 평사리 무딤이들 넓은 공허 속에 하아무라는 작가 한 사람의 사상과 발언이 조금씩이라도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아무 소설 세계는 안팎으로 무너지고 부서지는 이들이 토하는 절망의 신음, 하늘에 가닿는 원한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 아수라 지옥과도 같다. 이 점에서 하아무 문학은 비참의 문학이다. 그런데 이 같은 비참과 절망의 상황 저 깊은 곳에서는 견디는, 움트는, 나아가고 솟는 신생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다. “폐허 속에서 피는 꽃”처럼 “일그러졌으나마 온기는 사라지지 않는 세계”를 향해 움직이는 생명의 기운이 그것이다. 그 생명의 기운이 하아무 소설의 인물들이 “또 다른 빛 하나”를 마음에 품게 하고 비참과 절망의 바닥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도록 한다.”
독서모임 회원 넷은 차 한 대를 몰아 구례로 갔다. 구례에는 아이쿱자연드림이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쿱생협을 아는 분들은 구례를 한 번 다녀가기를 소원하곤 한다. 나는 하동에 남았다. 나는 혼자 남아 평사리 상평마을을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 주차장에서 만난 최승제 박사 일행이 뒤따르건 말건 돌아보지도 않고 달렸다. 오후 2시가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주말에 부지런을 떨어 하동으로 간 건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이제 나머지 하나를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극단 큰들의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보기 위해 공연이 열리는 최참판댁 앞마당으로 쫓아간다. 보통 때는 느릿느릿 쉬엄쉬엄 올라가던 길이다. 주변 가게에 진열해 놓은 온갖 물걸들을 수십 번 보고 또 보면서 올라가던 길이다. 뒷짐 지고 사진 찍어 가면서 오르던 오르막이다. 이날은 숨 가쁘게 뛰었다.
멀리서 날라리 소리가 들리고 북 소리 꽹과리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심장의 열기가 장딴지로 전해진다. 허벅지가 팽팽해진다. 사람들은 널찍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뒤쪽에 비어 있는 걸상에 앉았다.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열다섯 배우들이 쉴 새 없이 나왔다가 들어간다. 어떤 배우는 구르고 자빠지고 엎어진다. 어떤 배우는 악기를 두드려 공연에 음악을 넣는다. 이야기는 점점 넓혀지고 좁아진다. 넓어질 때도 느리지 않고 좁아질 때도 서두르지 않는다. 하동군 평사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간도로 이어지고,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이야기는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며 끝난다. 관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웃음과 울음이 뒤섞이어 마당극이 완성됐다.
<최참판댁 경사 났네>는 올해에만 벌써 네 번째 공연이고 전체 횟수로는 182회째 공연이다. 11년째 한 자리에서 한 작품으로 이어가는 장기 야외 공연이다. 주말마다 열리는 상설문화마당이다. 하동군이 야심차게 기획하고 지원하는 걸작 마당극이다. 입소문 글소문이 퍼지고 번져 온 나라 곳곳에서 일부러 찾아와서 보는 흥겹고 즐겁고 신명나는 한판 놀이이다.
그렇게 토요일을 보낸 나에게 고민이 생겼다. 5월 24일 일요일엔 오전 11시, 오후 2시에 공연을 한다. 하루에 두 번 판을 벌이는 것이다. 두 번 다 보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일요일 출근하여 밀린 일을 조금이라도 해 두지 않으면 다음 한 주가 무척 꼬여버릴 것 같았다. 두 번 다 보는 것을 포기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일찍이라고는 하지만 해는 이미 유리창을 밝게 비추고 있다. 잠든 아내도 깨우지 않고 스스로 밥과 찌개를 데웠다. 원래 아침밥은 대충 먹어 버릇해서 이런 건 잘 해낸다. 씻고 집을 나서니 7시 10분이다. 사무실 컴퓨터를 켤 때가 7시 30분이었으니 평일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잡념을 뿌리치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일이란 게 모두 글 쓰기이다. 써 놓은 글을 고치고 다듬는 일도 있다. 컴퓨터 자판 위를 종횡무진 달려준 손가락 덕분에 10시 50분쯤 되었을 때는 목표로 했던 일의 대부분을 처리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잡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바야흐로 여름으로 내달리고 있는 하동이 떠오른 것이다. 사실 하동을 마음놓고 생각하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던 것 아닌가. 사실 하루에 두 번 공연하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한 번이라고 보기 위해 일에 집중했던 것 아닌가. 작전은 성공이었다. 나는 페이스북에 ‘이제 출발한다.’라고 쓰고 ‘오전 11시 공연(183회) 시작 1분 전이다.’라고까지 쓴 뒤 컴퓨터를 껐다.
일요일에도 사무실 출근하는 동료가 많다. 주차장엔 자동차 여남은 대가 서 있다. 우리 홍보실 동료 한 명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다. 출발하려는 나와 마주쳤다. 서로 인사 나누었다. 동료 직원은 내가 하동으로 마당극 보러 출발하는 줄 눈치 챘다. 사무실에서 큰들 마당극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할 때가 더러 있으니, 내가 마당극 보러 가는 걸 얼마나 즐기는지 안다. 기회가 되면 함께 공연을 보러 갈 생각도 했었다. 마침 오늘이 그날인 셈이다. 둘은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했다. 이런 일을 두고 ‘의기투합’이라고 하는 건 어휘의 낭비가 아닐까. 하늘은 쾌청했다.
만약 하동 최참판댁이 조금 더 멀었으면 어땠을까. 가령 최참판댁에서 10분 정도 더 가야 하는 화개장터였더라면 어땠을까. 마음이 흔들렸을 가능성이 높다. 진주에서 1시간 만에 도착하는 최참판댁과 1시간 10분 걸리는 화개장터는 심리적으로 꽤 차이가 난다. 마음만 먹으면 후딱 다녀올 수 있는 시간 거리가 1시간 정도라고 본다. 그러나 1시간에서 10분만 더 가면 되는 거리라도 망설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2018년부터 현재까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까지 1시간 거리를 수십 번 갔다 왔다 하는 일도, 그것이 꼭 1시간 거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나는 여긴다.
차 한 대에 둘이 타든 셋이 타든 넷이 타든 1시간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충분히 나눌 시간이다.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모자람 없이 주고받을 시간은 된다. 어떤 사람이 더 곡진한 사연을 이야기하면 말없이 들어주면서 갈 만한 거리이다. 중간에 잠깐 쉬어도 좋고. 이날은 단둘이서 이야기 나누며 천천히 달렸다. 황치산 굴 입구에서 속도위반으로 찍혀 범칙금 3만 2000원을 낸 것이 바로 5월 22일이므로 나는 더욱 조심조심 운전했다. 주로 이야기하는 쪽은 나였고 동료 직원은 듣는 쪽이었다. 이야기 주제는 주로 마당극, 큰들, <최참판댁 경사 났네>였다. 도착하니 하늘은 어두웠다. 먹장구름이 몰려들었다.
‘사랑채’ 식당 구석에 앉아 비빔밥과 도토리묵과 막걸리를 시켰다. 막걸리 딱 한잔이 그립던 것이다. 공연 마치면 오후 3시쯤 되므로 그다지 걱정할 건 아니었다. 둘이 마주앉아 숟가락을 들려던 순간, 웬 낯익은 분이 들어선다. 아이고 반가워라! 바로 우리 과의 과장님 아니신가. 사모님과 함께 마당극 보러 최참판댁을 찾은 과장님이 하필 우리가 앉은 식당을 찾을 줄이야. 반가움에 벌떡 일어섰다가 앉았다. 과장님과 사모님은 식당 바깥에서, 우리는 안에서 밥을 먹었다. 밥값은 과장님이 내셨다. 고맙게도. 사모님은 오랜 큰들 후원회원이시다.
점심 먹고 일어서니 1시를 조금 지났다. 여유롭다. 앞날 시간 맞춰 도착하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가던 게 새롭다. 공연장까지 가는 길에 사람이 많다. 원래 1부 공연하던 용이네 집 앞을 지났다. 드디어 공연장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 심상찮다. 곧 한 줄기 뿌릴 태세다. 오늘 공연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싶은 찰나, 작은 빗방울 알갱이 하나가 이마에 닿는다. 뒷짐 진 손에도 닿는다. 빗방울 알갱이는 작았으나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목소리는 무거웠다. 아, 비가 오면 어쩌지….
큰들 단원을 만났다. 그의 얼굴을 보다가 하늘을 보다가 다시 얼굴을 보았다. 스피커 등 전자기기는 비닐을 덮어 씌워 놓았고 장구, 북 들은 치워 놓았다. 비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최참판댁 안채로 들어가니 배우들이 분장을 마치고 나온다. “우기 때문에 비가 온다. 내가 집으로 가 버려야겠다.”라며 농담을 던졌지만 마음은 유쾌하지 않다. 동료에게 “원래 용이네 집 앞에서 1부를 공연하고 2부는 안채인 여기서 공연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통합해서 바깥마당에서 공연한다.”라고 일러준다.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못 물이 까맣다. 잉어도 붕어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 빛과 연못 빛이 닮아 있는 특이한 날이다.
빗줄기는 쏘물고 빠르고 넓게 퍼진다. 이 정도 비는 그냥 비다. 안개비보다는 굵고 장대비보다는 아주 가늘다. 마당극을 하는 극단은 공연을 할까 말까 망설일 만하고 공연을 보는 관객은 보고 갈까 그냥 갈까 망설일 만하다. 하늘이 야속하다고 손가락질하기에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기도 그렇다. 애매하다. 모호하다. 최참판댁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1분 간격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호함을 분명함으로 만들어 달라는 간절함이었다. 그 분명함은 공연을 하는 쪽이었다.
극단 큰들 막내 배우는 펼쳐 놓은 걸상을 닦았다. 관객이 하나둘 찾아오니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닦은 걸상을 또 닦았다. 수건을 짜니 물이 주르륵 흐른다. 또 닦는다. 관객을 위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2시가 가까워진다. 최참판댁 맞은편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짙은 안개 때문에 산의 형체가 불분명하던 것인데 그사이 좀 나아진 것이다. ‘공연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내말씀이 나온다. “비가 그친다고 하니 조금 기다렸다가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관객 가운데 누가 “하늘에 전화해 보았느냐?”라고 농을 던진다. 2시 5분쯤 되자 과연 비가 잦아든다. 일단 공연을 시작했다.
버나놀이가 끝나자 배우들과 관객이 인사를 주고받는다. “비가 오는 날 이렇게 촉촉하게 만났는데 목소리 작게 이렇게 할 거에요?” 코로나19 때문에 올해 상설공연을 늦게 시작한 것도 그러하고 더군다나 첫날 빗속 공연에 이어 이날도 날씨가 이러하니 더욱 반갑고 귀한 자리가 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떠내려가기 전까지는 공연하겠습니다. 저희 배우들은 떠내려가도 좋습니다만, 여러분이 떠내려가면 안 되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런 대사는 외워서 오는 것일까 즉석에서 지어내는 것일까.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직접 듣는 것은 매우 기분 좋게 한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최참판댁 경사 났네> 184번째 공연은 그렇게 시작했다.
우리 일행 중 셋은 맨 앞줄에 앉고 나는 조금 뒤에 앉았다. 앞줄에서도 약간 오른쪽이다. 나는 익히 안다. 오른쪽 앞쪽에 앉은 남자 관객 누군가는 ‘등등동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랜 관람 경험으로 잘 안다. 우리 일행 옆에 한 남자 관객이 강아지를 안고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하지만, 나는 속으로 ‘오늘 등등동지는 저 사람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생긴 모습도 멋지고 덩치도 좋다. 머슴 기타등등도 해야 하고 서희의 신랑 역할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독립군 등등동지를 하기엔 가장 알맞아 보였다. 내 생각에는 그랬다. 비는 점점 더 가늘어져 가고 있다. 우산을 받쳐 들었던 관객들이 우산을 접었다.
조준구가 말한다. “만석지기 살림이라 하인들이 많소. 여기 김서방, 최서방, 박서방, 개똥이, 소똥이, 삼수, 사수….” 나는 조준구의 손가락 끝을 예의주시한다. 내 짐작이 맞을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조준구는 내가 점찍은 사람 가까이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 내 앞에 앉은 김동주 선생을 지목하며 “기타 등등!”이라고 외친다. 그렇다. 나와 함께 마당극 보러 출발한 사무실 동료는 경상대 홍보실 김동주 선생이다. 유튜브에서 ‘홍아’(홍보실 아재)로 유명하다. 마당극을 처음 보는 김 선생은 “등등아, 에어컨은 빵빵하게 틀어 놓았느냐?”라는 조준구의 말에 “예~!”라고 잘도 대답한다. 그런데 이 대답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짧은 대사 하나에 그의 끼가 드러난다.
그의 끼는 맨 처음 임이네가 “아이고, 박 서방~!” 하면서 막걸리를 건넬 때부터 표가 났다. 임이네가 막걸리를 한잔 따라주자 입마개를 벗은 뒤 달달한 꿀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잘도 마신다. 거기까지는 대개 비슷하다. 그런데 김 선생은 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뒤집어 보여주기까지 한다.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는 뜻이다. 이건 연기다. 박 서방이 머슴 기타등등으로도 되는 일은 흔치 않은 듯하다. 아무튼 이날 공연은 ‘김 선생을 위한’ 공연이라고 이름붙여도 됨 직하다. 왜 그런가.
김 선생은 그 뒤에 잇따를 자신의 역할을 통 모른다. 조준구 일당이 최씨 집안의 재산을 분탕질하며 춤추고 노래 부를 때 신나게 손뼉을 친다. 맨 앞자리에 앉은 관객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듯이 적극 참여한다. 웃고 손뼉 치고 소리 지른다. 바로 뒤에 앉은 나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다.
서희와 길상이 결혼을 할 대목이다. 주례가 “신랑 신부 맞절~!”을 시키는데 신랑이 없다. “신랑 어디 갔노?”라고 묻는다. “신랑예~? 저기 있네~!”라고 외치며 김 선생을 가리킨다. 김 선생은 자기는 이미 머슴 기타등등을 했기 때문에 자기 역할을 다한 줄로 알았을 것이다. 배우들이 자기를 가리키는데도 뒤에 있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싶어 돌아본다. 마당으로 불려나간 김 선생은 배우보다 더 배우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관객은 요절복통 웃스워 죽을 지경이다. 맞절을 한 뒤 댕기풀이를 하느라고 김 선생을 뉘어놓고 발을 묶는다. “신랑 죽겠다~!”라며 엄살을 떨어 서희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장면이다. 배우들이 이래라 저래라 시키지 않았는데도 잘도 연기한다. 마치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여러 번 보아온 관객 같다. 마침내 서희가 노래를 부른다. 신랑도 일어나 함께 춤을 추어야 한다. 처음엔 머쓱거리던 관객 배우도 결국은 춤을 추게 된다. 그렇게 이끈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춤 솜씨를 볼 수 있는 기회다.
김 선생도 서희가 부르는 <열일곱 살이에요>라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춤동작이 웃긴다. 관객들은 웃다가 울 지경이다. 그사이 실제 신랑인 김길상이 들어오자, 머쓱해하며 무안해하며 미안해하며 머리에 쓴 사대관모를 벗어주는 장면도 압권이다. 표정과 동작이 살아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보았지만 이처럼 웃기는 관객 배우는 보지 못했다. 잘 모르던 배우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연기해도 우스워 미칠 지경일 텐데 너무나 잘 아는 직장 동료 김 선생이 머뭇거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공연에 임하는 것을 보니 그 우스움과 즐거움은 수십, 수백 배는 되는 듯했다.
마당극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이윽고 일제강점기가 된다. 독립군이 등장한다. 하동 평사리 출신 김길상은 독립군 대장으로 등장한다. 독립군은 먼저 관객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준다. 보통 맨 앞에 앉은 사람이 자기 것만 갖고 나머지는 뒤로 넘긴다. 고등학교 때 시험지를 뒤로 넘기는 것과 같다. 하지만 김 선생은 직접 일어나서 한 명 한 명에게 태극기를 나눠준다. 바로 뒤뿐만 아니라 제법 먼 곳까지 직접 걸어가 한 분 한 분께 태극기를 나눠준다. 이런 관객은 잘 없다. 그가 얼마나 이 마당극에 몰입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고 몰입을 넘어 마당극이 성공적으로 끝나도록 돕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사격연습을 한다. 한 배우가 말한다. “우리 독립군 최고의 명사수 등등동지의 시범이 있겠습니다.” 나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자기에게 무슨 역할이 주어질지 모르는 김 선생은 또 얼떨결에 마당으로 불려 나간다. 한번은 머슴 기타등등으로, 한번은 서희와 결혼하는 남자로, 마지막으로 독립군 등등동지가 되는 것이다. 독립군이 된 김 선생은 과연 독립군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어깨에 잔뜩 힘을 넣었다. 걸음걸이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한다. “충성~!”이라고 하며 경례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등 명사수 등등동지 김 선생은 일본군을 명중한 공로로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고서는 관객에게 얌전하게 인사하는 것까지, 그는 어쩌면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외형적으로는 아무 정보도 없이 관객으로 왔다가 얼떨결에 등등동지까지 된 상황이지만, 김 선생은 이미 잘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철저하게 자기의 연기를 해 나갔다. 물론 나는 그에게 이런 정보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러한 역할이 자기에게 주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김 선생은 완벽했다. 완벽하다는 말은, 당황하면서도 당황하지 않은 듯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아닌 것처럼 했다는 말이다. 자신이 어떻게 연기하면 관객들이 더 재미있어 할지를 익히 잘 아는 사람 같았다는 말이다. 나는 아낌 없이 손뼉을 쳤다.
공연이 끝났다. 얼마나 웃었는지 볼이 다 아플 지경이다. 눈물이 찔끔 찔끔 날 지경이다. 마렵지도 않던 오줌이 마려울 지경이다. 아, 관객 배우가 아는 사람일 경우는 그렇지 않은 때보다 더 웃기고 재미있구나. 돌이켜 보면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 아는 사람이 등등동지로 등장한 게 처음은 아니다. 2018년 가을 어느 날 김순남 선생님이 등등동지로 출연한 적 있다. <오작교 아리랑>에서도 잘 아는 사람이 남돌이로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모르는 사람보다 더 재미있고 기억에 오래 남았다. 마당극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과 낯가림을 뿌리치고 용기를 내어 준 수많은 등등동지와 남돌이들에게 잠시 경의를 표한다. 나는 내가 등등동지나 남돌이로 불려나가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어쩌지 못해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그 뒤로는 절대 마당극 보러 안 갈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우들은 비에 젖은 마당판에서 앉고 구르고 엎어졌다. 관객이 있으니까 공연했다. 관객들은 비에 젖은 의자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즐겼다. 배우들이 공연을 하니까 자리를 뜨지 않고 지킨 것이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를 의지한 채 귀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공연을 함께한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는 배우의 인사말씀을 받아, “어떤 날씨에도 상관없이 항상 최고의 마당극을 만들어주는 큰들에게 감사드린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돌려드렸다.
이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이틀 연속으로 최참판댁을 찾아갈 수 있었던 일정과 사연과 환경이 고마웠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걸어가는데 김 선생이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에라도 갔는가 싶어 돌아보니, 아, 그는 큰들 후원회원 가입 원서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등등동지에서 후원회원으로 신분이 바뀌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원서를 다 쓰고 나서 큰들 막내 배우 윤민서 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큰들 기획실장이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면 좋겠다고 하여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배우들을 찾아갔다. 등등동지가 사실은 나와 동료이고 오늘 후원회원에도 가입했다고 인사했다.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반갑다고 인사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는 재미없는 ‘이우기의 큰들 사랑 특강’이 이어졌다. 두서 없이 횡설수설하는 자랑 겸 사랑 겸 취미생활을 웃으며 열심히 들어준 김 선생이 고맙다.
하동에는 늦봄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하아무 소설가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고 큰들이 웃음을 만들어 주고 있다. 휘황찬란한 조명도 없고 구름떼 같은 관중도 없고 언론의 빛나는 관심도 없지만 그들은 하동을 사랑하고 하동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동이 그들을 키워가고 있다.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날씨와 시시때때로 즐겁게 찾아오는 관객과 이따금 홍보성 글을 올려주는 언론들의 관심 덕분에 하동 <최참판댁 경사 났네>가 11년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에서 독서모임을 하는 후배들이 찾아가면 늘 그렇듯 하얗게 웃으며 반겨주는 하아무 형이 있음으로써 앞으로도 나는 마당극 하동 공연 관람 행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있어 하동은 ‘늘 봄’이다.
2020. 5. 25.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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