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인공은 박수갈채를 받는다. 큰 상도 받는다. 언론은 주인공을 집중 조명한다. 주인공 한 명 몸값이 웬만한 조연 수십 명과 맞먹는다. 주인공을 잘 뽑아야 영화가 성공한다. 주인공은 대사 양이 가장 많고 연기도 가장 많이 해야 한다. 조연이었으면 하지 않아도 될 위험하고 무모한 연기도 간혹 한다. 똥통에 빠지거나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게 주인공이다. 주인공에게 세상의 박수가 쏠리는 건 타당하다. 연극에서도 그렇고 연속극에서도 그렇다. 마당극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조연은 무엇인가. 주연을 보조하는 것이다. ‘보조’는 늘 뒷전이기 일쑤다. 조연은 주연에 맞서 싸우는 악당 역을 하다가 졸지에 죽기도 하고 주연의 동생이나 부하, 또는 이웃 역할도 한다. 주연 주변에 서성거리는 경우도 있지만 숫제 주연 배우와는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조연도 쌨다. 단역과 주연의 중간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만 조명을 받는 일은 흔치 않다.
조연이 감칠맛 나게 연기를 잘하면 역시 칭찬을 듣는다. 명품 조연이라는 말이 있다. ‘신스틸러’(Scene Stealer)라는 말은 영화평론가들이 흔히 쓰는 영어인데, ‘훌륭한 연기력이나 독특한 개성으로 영화나 연속극에서 주연보다도 더 주목받는 명품 조연’을 말한다. 조연의 연기력에 따라 영화나 연속극, 연극 전체의 흐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조연은 조연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편의 극을 오래도록 기억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에 이런 말이 떠돌았다. “우리나라 영화를 둘로 나누면?” 답은, “명계남이 출연한 영화와 출연하지 않은 영화다.” 얼마나 깔끔한가. 명품 조연 명계남이라는 배우가 조연으로(또는 단역으로) 하도 많이 출연하니 국산 영화 절반에 그가 나올 정도라는 이야기다. 어떤 영화에서는 주연으로 활약했지만, 유해진은 주연일 때보다 조연일 때가 더 빛났던 것 같다. 지금은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배우’로 믿고 보는 국민 배우라는 말을 듣지만, 송강호는 영화 <넘버3>에서 한석규가 넘버2냐 넘버3이냐를 놓고 다툴 때 넘버5쯤 되는 조연으로 나왔다. 그 영화에서 송강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것은 톡톡 튀는 그의 외모와 대사, 그리고 연기력 덕분이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과 성춘향만 있고 방자와 향단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밋밋하고 까끌까끌한 고전소설을 대하게 됐을까. <심청전>엔 뺑덕어멈이 있다.
한 해에 극장에서 영화를 두세 편 정도 겨우 보는 내가 왜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하는가. 텔레비전 연속극은 2014~2015년 방영한 <가족끼리 왜 이래> 이후 본 적이 없는 내가 주연, 조연을 들먹이는 건 무슨 까닭인가. 바로 극단 큰들의 마당극에서 명품 조연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명품 조연이란 앞서 말했듯이 주연보다 더 눈길을 끄는 조연이다. 명품 조연 한 명을 발견했다기보다는 조연의 명품 연기 덕분에 마당극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졌고 관객들의 반응도 더욱 뜨거워졌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그만큼 대본이 훌륭하고 전체 배우들의 조화가 잘 엮였다는 뜻이다.
<오작교 아리랑>은 남쪽마을 남돌이와 북쪽마을 꽃분이가 부모 허락 없이 결혼을 하려 하는데 그것을 뜯어말리는 양가 부모들의 이야기다. 양가 부모가 이 마당극의 주연이다. 남돌이와 꽃분이는 오히려 조연이라고 하는 게 맞다. 배우 남돌이는 얼굴을 한번도 안 보여주고 배우 꽃분이는 다른 배역도 맡는다. 그 외 배우들도 다양한 역할을 맡기 때문에 ‘통합 연합 조연’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본다. 마당극 시작부터 끝까지 한 가지 역할로 조연 연기를 하는 배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큰들 마당극에서는 모두가 주연이고 모두가 조연이다.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는 조준구와 길상이 주연이다. 서희는 주연급이다. 일본군인과 장교들은 조연이다. 그 외 독립군도 등장하고 마을아낙도 나오는데 모두 조연이거나 단역이라고 할 만하다. 조연들은 한 가지 배역만 맡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이 두세 가지 역할을 맡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내용을 열심히 따라가지 않으면 나중엔 누가누군지 모를 수도 있다. 역시 모두가 주연이고, 또한 조연이라고 할 만하다.
<남명>에서 주연은 단연 남명 조식 선생이다. 하인 돌이는 조연이다. 나머지 배우들도 모두 조연이다. 우뚝 선 한 명의 주연과 수십 명의 조연이 똘똘 뭉쳐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이 작품에서 조연들 역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마을 청년이었다가 남명 선생의 유생이었다가 마을 아낙이었다가 남명 선생의 제자였다가 의병장이 된다. 조연이기는 하되 명품 조연, 신 스틸러라고 불러주기엔 뭔가 격이 맞지 않은 듯하다는 이야기다. 두부 자르듯 주연과 조연을 나눌 수 없다는 말이다.
<오작교 아리랑>, <최참판댁 경사 났네>, <남명>에서 주연은 분명한데 조연은 애매하다. 마당극 시작부터 끝까지 한 가지 배역만 연기하는 조연은 없기 때문이다. 적은 수의 배우로 많은 역할을 소화해 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이나 갈등구조가 여느 영화나 연속극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기 때문에 배우들은 순간순간 명품 조연으로 빛나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모두가 빛나는 조연이어서 따로 명품 조연이라고 불러줄 까닭이 없는 것 아닐까. 아무튼 그렇다.
이렇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왜 하는가. 우리에게 <효자전>이 남았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으로 훑어보고 뜯어보고 뒤집어보고 째려보고 노려봐도 명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효자전>이 오늘 이 글의 주인공 작품이다. 그러니까 나는 <효자전>에 등장하는 여러 배역 가운데 조연이라고 할 만한 어떤 배역(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오늘 또 이렇게 길고 긴 세설을 풀어놓는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하면 끝이다. “극단 큰들의 마당극 <효자전>을 볼 때 조연으로 나오는 누구누구의 연기와 역할을 놓치지 마세요.”라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말해버리면 좀 난폭하고 성의 없다고 지청구를 들을 것 같다. 그래서 왜 그런지를 중언부언 설명해 보려고 한다.
<효자전>은 2010년 5월 8일 처음 공연한 작품이다. 어버이날에 <효자전>을 처음 공연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만든 지 10년째 되는 작품인데 올해 5월 8일쯤 10주년 기념공연을 하면 좋겠다. 코로나19가 진정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코로나19가 물러나지 않고 계속 방해한다면 ‘온라인 공연’이라는 걸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큰들은 어디에서 알아서 공연하고, 관객들은 집에서 유튜브를 접속해 관람하는 방법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효자전>은 대본, 배역, 연기, 음향, 악단, 주연, 조연, 소품 들이 매우 조화로운 작품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고가는 것도 뛰어나고 전설을 인용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심지어 작품 공연을 도와주는 산청군 홍보까지 깨알같이 박혀 있다. 마당극이 갖춰야 할 요소가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뿐이랴. 매우 교훈적이다. “부모님께 효도하라.”라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이고 백행의 근본인데 이것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보여주고 들려준다. 눈물 찔끔 나도록 가르친다. 어린이에서부터 칠순팔순 어르신들까지 다 함께 즐겁게 손뼉치며 보다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찡해지는 작품이 <효자전>이다.
<효자전>은 지리산 산청 약초골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두 아들의 효도 이야기다. 어머니와 두 아들이 주인공인 셈이다. 큰아들은 귀남이고 작은아들은 갑동이다. 어머니는 강끝순이다. 어머니 이름까지 자세히 밝히고 나서는 건 그만한 까닭이 있다. 세 주인공을 중심으로 마을 한의원인 임뻥아재와 그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갑동이의 마을 친구도 있고 한양에 사는 내의원 대감과 동료 의사, 그리고 그들이 술 마시러 가는 집의 기생도 나온다. 지리산 천왕봉에 깃들여 사는 산신도 등장하고 무덤에서 귀신도 나온다. 반달곰도 나온다. 우편배달부도 있지. 출연 배역이 화려하다. 어머니, 귀남이, 갑동이, 임뻥아재, 임뻥아재 어머니는 각각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임뻥아재 어머니는 잠시 다른 역할로도 나오는데 여기에 또한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다. 나머지 갑동이 친구들, 기생들, 의사들, 산신들은 몇몇 배우가 이리저리 번갈아가며 맡는다.
<효자전>만 19회 관람한 내가 가장 눈여겨보는 배역은 임뻥아재의 어머니이다. 할머니 역할은 ‘극단 큰들’ 단장 류연람 씨가 맡았다. 마당극에서 갑동이가 부르는 대로 ‘할매’라고 부른다. 할매는 치매에 걸렸다. 자기 아들 임뻥아재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른다. 똥을 길바닥에 누고서는 떡이라고 하고 나중에는 돈이라고 우긴다. 무엇만 봤다 하면 내 것이라고 뺏으려고 하고 실제 뺏는 데도 선수다. 머리는 하얗고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으며 키는 작달막하다. 허리가 꼬부라져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곁에 누군가 슬퍼하면 따라 슬퍼할 줄 알고 가래침을 뱉으면 따라서 뱉기도 한다. 누가 무슨 말이든 한마디 하면 곧잘 따라한다. 몽유병을 앓고 있고 정신이 맑았다 흐렸다 하는데 흐린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늙어 보이는 것에 견주자면 의외라고 할 만큼 또랑또랑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일품이다.
모두 말해 버리면 <효자전>을 보고 싶어하는 예비 관객이 화를 낼지 모르니 적당하게 운만 띄운다. 마당극 <효자전>은 이 할매가 없으면 완성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극 중간중간에 관객들 웃음을 이끌어 내는가 하면 극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한다. 할매는 임뻥아재가 잡은 쏘가리를 가로챈 갑동이 친구들에게서 다시 쏘가리를 뺏는다. “내 끼다~! 메에~롱!” 이게 할매를 상징하는 대사이다. 극 초반에 한 번 나온 이 대사를 잘 기억했다가 극 중간과 말미에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살필 일이다. 특히 맨 마지막 부분에 할매가 “내 끼다~! 메에~롱!”이라고 하는 순간 생과 사, 이승과 저승이 모두 뒤틀어져 버리는데, 그 막중한 반전이 할매의 이 대사 하나에 달렸다.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겨버리면 지구의 절반이 죽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좀 심한가?
<효자전> 맨 처음엔 우편배달부가 등장한다. 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말이다. 극단 큰들에서 <효자전> 공연 구경 온 사람에게 전하는 편지를 읽어준다. 이 배달부는 다시 한번 편지를 들고 등장한다. 한양에 내의원 시험 치러 간 귀남이가 어머니께 보낸 편지다. 그런데 이 배달부가 사람 이름을 헷갈려 한다. ‘끝순’인지 ‘말순’인지 잠시 헷갈리는 것이다. 끝순에게 배달해야 할 편지를 할매에게 전달하고 만다. 까막눈이라서 한글을 읽지 못할 귀남 어머니 즉 끝순에게 임뻥아재가 편지를 대신 읽어주도록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매가 한 것이다(이런 설명은 직접 마당극을 보면 곧바로 알아챌 것인데 말로 글로 설명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로구나). 편지배달로 평생을 먹고사는 우편배달부가 끝순과 말순을 헷갈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보통이 아닌 일이 나중에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는지를 긴장하며 볼 일이다. 그 한가운데 조연배우인 할매가 있다.
할매는 길바닥에 똥을 눠 놓고는 떡이라고 우긴다. 그 떡을 들고 “떡 무라!”라며 관객들에게 다가가고 관객이 장난치느라고 그 떡을 달라고 하면 자기 것이라고 주지 않는다. 한양 귀남이 돈을 부치라고 편지를 보내오자 임뻥아재는 “돈? 이 촌에서 돈이 오데 있노?”라며 혀를 찬다. 그때 할매는 “아범아! 돈 있다.”라고 근엄하게 말한다. 이때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하다. “어머이, 돈이 어딨습니꺼?”라고 임뻥아재가 반색하며 묻자 할매는 “여기!”라면서 그 똥을 들이민다. 임뻥아재는 기겁을 하고 달아난다. 할매는 “아버지~ 아버지~”라면서 제 아들인 임뻥아재를 찾아가다가 그 똥덩어리를 악사를 맡고 있는 배우에게 던진다. “아나, 떡 무라~” 악사는 넉장거리를 한다. 마당판에서 할매의 존재감은 무척 크다.
임뻥아재와 갑동이 공동묘지에 갔다. 처녀 무덤을 파서 다리를 잘라낼 작정이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다리를 갖고 가서 가마솥에 고면 산삼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귀신 울음소리가 들리고 으스스한데 누군가 임뻥아재 허리를 감싼다. 혼비백산한다. 갑동이 겨우 정신을 차려 자세히 보니 할매다. “아재, 할매 아닙니꺼?”라고 한다. 할매는 몽유병이 도져서 그 한밤중에 공동묘지까지 나들이한 것이다. 관객들은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잠시 한숨 놓는다. 이제 실제 무덤을 파헤친다. 갑동의 괭이질이 날카롭다. 처녀 시체 다리를 잘랐다. 그때 누군가 임뻥아재의 허리를 감싼다. 임뻥아재는 이번에도 할매인 줄 알고 “어머이는 집에 들어가세요.”라고 한다. 그런데 진짜 할매가 나타났다. 그럼 조금 전 할매인 줄 알고 밀쳤던 건 누구란 말인가. 무엇이란 말인가. 귀신이 등장했다. 할매 덕분에 관객은 가슴을 졸였다 놓았다 다시 졸이게 된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감초라고 할 수밖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상여가 나간다. 임뻥아재의 상엿소리는 아주 구슬프다. 키 큰 저승사자가 등장하고 어머니의 영혼이 뒤따른다. 할매가 지팡이를 들고 나타난다. “갑동이 엄마 갔다. 갑동이 엄마가 갔다.”라고 말하는 할매의 목소리는 촉촉하다. 그도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촉촉한 정도를 넘어서는 슬픔은 묻어 있지 않다. 치매를 앓고 있기 때문에 사리분별이 온전하지 않다. 꼭 그 사이의 음색이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안타깝다. 이웃의 죽음마저 제대로 온전히 슬퍼할 수 없는 치매가, 치매라는 고통이 와닿는다.
그사이에 한양에서 대감에게 배신 당한 귀남이 거지꼴로 낙향한다. 갑동이가 울고 임뻥아재가 울고 할매도 운다. 귀남이 초상집에 들어선다. “어! 귀남이 왔다. 귀남이~! 오호호~!”라고 먼저 말하는 건 할매다. 할매의 음색은 환갑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안타까움보다는 귀남에 대한 반가움이 더 큰 목소리다. 현재의 슬픈 상황을 완전히 탈색해 버리고 객관적인 사실만 전달하는 해설자 같다. 낯선 장면 같다. 그래서 슬픔은 더 고조되는 것이다.
저승사자가 저승명부를 들고 저승으로 들어간다. 강을 건너기 직전이다. 무슨 강인가? 외국에서는 ‘레테의 강’이라고 하는 망각의 강이다. 그 강을 건너는 순간 이승에서 있었던 모든 것은 잊어진다. 만약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려면 그 강을 건너기 전에 저승사자와 결판을 해야 한다. 저승사자가 강을 건너기 직전에 할매는 저승사자 겨드랑이에 끼어 있는 명부를 발견한다. 자, 할매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할매의 엉뚱한 행동은 과연 어떤 결말을 가져올 것인가. 궁금하면 보러 갈 수밖에 없겠지.
할매의 대사와 행동은 <효자전-별전>으로 다룰 만하다. 두 아들의 지극한 효도 이야기라는 기본 주제 말고, ‘우리 사회에서 치매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다룸 직하다는 말이다. 아들을 아버지라 하고, 똥을 떡이라 돈이라 하고, 남에게 온 편지를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아이들이 구워 먹으려던 쏘가리를 자기 것이라고 뺏어 간다. 개구쟁이처럼 “메에~롱”이라며 혓바닥을 보기 좋게 내밀어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초상집에서 ‘재수없게’ “갑동이 엄마 갔다!”라고 외친다. 할매를 보고 있노라면 치매라는 병증이 가진 무서움을 알겠다. 우리 사회에 수없이 많은 치매 환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도 된다. 나 또한 나중에 정신줄을 놓게 되면 저 할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싶어 한편으로는 두려워진다. 그런 것을 효도 이야기가 주제인 <효자전>에서 보고 느낀다. 치매 걸린 어른들을 더욱 더 극진히 모셔야 한다는 것, 그것 또한 <효자전>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아닐까.
할매 역을 맡은 류연람 배우는 또한 산삼할매로도 열연한다. 산삼할매는 갑동이와 임뻥아재가 산삼 구하러 천왕봉으로 가는 대목에 등장한다. 갑동의 효심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갑동이가 제 어미뿐만 아니라 이웃의 어른들도 공경하는지 시험한다. 반달곰을 불러 의협심도 재 본다. 시험 결과는 만족이다. 임뻥아재가 산삼할매를 보니 어데선가 본 듯한 인물이다. 내용으로 보자면, 치매 걸린 노모와 산삼할매는 완전히 다른 배역이다. 닮았다거나 비슷하다거나 할 계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임뻥아재는 “어이서 마이 본 사람 같은데….”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줄 아는 관객들은 또 한 번 웃게 된다. 조연 할매의 존재감은 <효자전> 처음부터 끝까지 줄어들지 않는다.
마당극 <효자전>에서 할매는 조연이다. 빛나는 주연이 아니다. 그렇지만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조연이다. 갑동이와 임뻥아재 사이에서, 임뻥아재와 귀남이 어머니 사이에서, 어머니 초상날 사실을 전달하는 위치에서, 귀남의 귀향을 설명하는 위치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죽은 자를 살려내기 위한 극적 장치에서 이 치매 걸린 할매의 존재는 매개 역할이자 극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이다. 이 조연의 감칠맛 나는 연기 덕분에 <효자전>은 더욱 재미있고 더욱 감동적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덕분에 마당극 <효자전>이 더욱 빛나고 유명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리를 구부린 채 지팡이에 의지하여 마당판을 종횡무진하는 할매 덕택에 관객은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손뼉치는 것이다.
치매 걸린 할매 역을 맡은 류연람 극단 큰들 단장은 <오작교 아리랑>에도 나오고, <남명>에도 나오고, <역마>에도 나오고,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도 당연히 나온다. 배우는 열서너 명인데 배역은 한 작품당 수십 명이므로 한 배우가 두세 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여러 배역을 연기하는 것을 살펴보고 분석해 보고 비교해 보는 것 또한 큰들 마당극을 보는 재미이다. 류연람 단장은 <효자전>에서는 할매와 산삼할매 역할 두 가지만 한다. 이 두 가지 배역 모두 <효자전>을 효도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꼭 필요한 배역을 꼭 알맞은 배우가 정말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사회에도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을까. 어떤 큰 회사의 대표를 주연이라고 해줄까. 그렇다면 그 회사의 수많은 노동자는 조연일까. 뛰어난 성과를 나타낸 과학자를 주연이라고 해줄까. 그렇다면 그 밑에 일하는 수많은 연구원들은 조연일까. 대학의 총장이 주연이면 나머지 교수나 직원은 조연일까. 총동창회장이 주연이면 나머지 동문들은 조연일까. 운동 경기에서 주장과 감독만 주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삶에서는, 사회에서는 모두 주연이다. 각자 주연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두가 주연이고 모두가 빛날 때 사회는 더욱 아름답게 되고, 그 개개인의 삶도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모든 주연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조화롭게 협업하고 긴밀하게 소통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대표 같은 윗자리는 그런 일을 제대로 잘 하라고 만들어준 자리이다. 이걸 잘 모르는 사람이 윗자리에 앉아 자기만 주연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으면 그 사회는, 그 조직은 갈등과 분열이 끝없이 이어지게 돼 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효자전>이 주연이고 나머지 마당극 작품들은 죄다 조연이다. 어쩔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나머지 작품도 모두 주연이다. 일단 오늘은, <효자전>에 박수 보내드리고, 주연인 어머니와 두 아들보다 조연인 치매 걸린 할매께 손뼉 쳐 드린다. 멋진 연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 그런 마음을 몇 자 적어놓는다.
2020. 4. 13.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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